‘파라클레토스’(보혜사 παράκλητοςς)

신약신학의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온 것은 성령론이다. 특히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를 중심으로 누가와 바울의 다양한 견해들이 논의됐다.

요한은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신약성경 안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술어인 성령의 활동과 사역을 강조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예수의 떠나심’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고별담화의 중심 부분(요 14:16, 26; 15:26; 16:7)에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성령의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나타내는 관점으로 성령을 묘사한다. 무엇보다 동일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단어를 ‘보혜사’로 번역하였으며, 요한일서에서는 ‘대언자’(요일 2:1)로 다르게 나타난다.

명사인 ‘파라클레토스’는 수동형의 의미와 능동형의 이중적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수동형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요청 받은 자”라는 의미로 “변호하는 자(Advocate)”로 번역돼 있다. 반면에, 능동형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나타난 자”로, “위로자(Comforter)”, “중재자(Intercessor)”, 혹은 “돕는 자(Helper)” 등으로 번역한다. ‘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oς)의 기능과 역할

_선생과 증인의 기능과 역할
‘파라클레토스’로서 성령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 중 하나는 선생의 기능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에서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것을 언급하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실 선생의 기능을 하신다.

또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에서는 “진리의 성령”(요 15:26, 16:13)이란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과 파라클레토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말씀처럼 ‘진리’는 예수님의 영적 실체 또는 영적 속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증거하듯이(요 17:8), ‘진리의 성령’도 예수를 증거하는 계시자이심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이 오직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만 이루고 그분의 말만 하듯이, 성령도 자의적으로 말하거나 자기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것을 말하고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선생의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는 동시에 증인의 역할도 동일하게 감당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계시하는 자이다. 다시 말해 ‘파라클레토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드러내고 계시한 것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시한다.

_예언의 기능
‘파라클레토스’의 또 다른 기능과 역할은 예언에 관련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언은 계시 차원의 예언과 미래 차원의 예언으로 구분한다, 계시 차원에서 예언은 말씀을 받은 자로서 선생의 기능 속에서 그 역할이 나타나며, 미래 차원에서의 예언은 선지자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에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선생의 역할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처럼 베드로의 미래와 관련된 예언을 알려주는 선지자 기능도 제시되고 있다.

‘진리’인 예수님께서 공생에 기간 제자들을 가르치고 베드로가 어떠한 순교적 죽임을 당할지 장래의 일을 말하신 것처럼 ‘진리의 성령’이신 ‘파라클레토스’ 역시 가르치는 선생과 예언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예언의 기능은 구약성경의 선지자 역할과 동일하다.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미래를 향한 예언을 선포하였는데 그것은 언제나 그들을 향한 계시적 차원에서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와 미래의 예언이 주어졌다.

_변호와 심판의 기능
‘파라클레토스’의 또 다른 기능은 변호와 심판의 기능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에서는 ‘파라클레토스’는 세상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변호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8~11)에서는 세상을 향하여 심판과 정죄를 하는 심판 주의 기능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는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인 성령은 세상을 심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대조적인 이중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안에서 ‘파라클레토스’의 변호의 기능은 요한일서와는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에서 ‘대언자’로 언급된 예수님의 정체성은 단순한 중재나 중보의 의미를 넘어 변호의 의미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한 인간을 예수님은 변호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또한 ‘파라클레토스’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을 위한 대언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파라클레토스’의 관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에서 성령과 예수와의 관계를 ‘파라클레토스’와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라 말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요청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는 것으로 묘사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라클레토스’이신 것 같이, 예수님의 요청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듯이, 성령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 주가 아니라 구속 주 이심을 요한복음 안에서 강조된다. 오히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처럼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 자체가 심판으로 드러난다. 즉,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심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의한 직접적인 심판은 요한복음 안에서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안에서 심판 주의 역할은 ‘파라클레토스’에게 전가되어 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심판 주로서의 예수님의 기능이 또 다른 보혜사의 성령에게 위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과 ‘파라클레토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4) 등은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거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더 나아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는 성령이 제자들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이 예수님에 의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의 집에 찾아오셔서 자기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명령하시는데 그 자세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숨을 내쉬며”의 표현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지창조 모습을 연상케 한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명하실 때 행하셨던 ‘숨을 내쉬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모습과 표현상 일치한다.

    즉,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행위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원 창조에서 중요한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명하실 때 행하신 ‘숨을 내쉬는’ 행위는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성령으로 인해 재창조가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즉,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성령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신앙 공동체 형성을 위한 그리고 새 시대의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들로 재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내어진 것 같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제자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전 기사선교지 선택에 대한 도움말
    다음 기사민수기
    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