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신학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그에 대한 유대인의 대응은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통해 흥미로운 일면을 볼 수 있다. 성전 파괴 후 약 10여년이 되는 AD 79년에 기록된 『유대전쟁사』에서 요세푸스는 성전 없는 유대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13년 뒤인 AD 92년 『유대 고대사』를 펴낼 즈음에는 자신의 처음 견해와 반대되는 성전이 없이도 유대교가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요한복음 기록연대를 잠정적으로 80~85년으로 볼 경우, 요세푸스의 두 권의 책 속에서 유대인의 성전에 대한 견해가 달라진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성전 파괴 후, 시간이 경과 되면서 처음의 충격이 점차 사라지고 성전의 부재를 극복할 여러 대처 방안이 나타났음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전 파괴가 처음 일어난 것은 BC 587년이다. 성전이 파괴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에서 자행한 온갖 가증한 일과 심각한 우상 숭배로 여호와의 영광(하나님 자신)이 성전을 떠났기 때문이다(겔 10:18; 11:23).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겔 8:6).
이때로부터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없는 시대’로 묘사되며 성전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대응 전략이 필요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의 상실에 대하여 대안 역할을 한 것은, 새로 나타난 유대인들의 ‘회당(Synagogue)’이 아닌 바로 ‘여호와의 임재’였다. 이는 사로잡혀 간 이들을 위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 11:16)라는 말씀에 이어, 다윗의 아들인 메시아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직접 찾아오시는 약속(겔 34:11-16)의 연장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찍이 이런 현상은 신명기적 역사 신학이 해결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미 솔로몬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구조물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적절한 처소가 될 수 없음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늘이라도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분명한 인식(왕상 8:27)을 드러냈다. 이사야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성전 및 약속의 땅에 대한 상실을 낳은 것이며, 하나님의 집이 도둑의 소굴(렘 7:11)로 변한 상황에서, 단순히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렘 7:4) 반복해서 외치는 것은 전혀 무익한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흩어진 자들을 다시 모으시고, 화평의 언약을 세워 파괴된 옛 성소를 대신할 새 성소를 약속하신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6-27). 이는 동시에 종말론적 새로운 성소(겔 40-48장)의 회복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의 성전 신학
무엇보다 요한복음은 AD 70년 이스라엘 정체성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국가적 종교적 ‘영적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사회적 혼란과 종교 지도자들의 방향 상실 가운데 이를 극복하려는 유대인을 향한 복음서이다. 즉,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들에게 이제 ‘성전 없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실질적인 신앙의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적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 해답의 하나로 요한복음은 기독론적 성전 신학으로 말씀의 성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어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 직접적으로 가까이 거하실 날이 온다는 구약의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구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요한복음 1:14의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개역개정: 장막을 치셨다)는 성전 모티프를 갖는다.
또한 계시의 장소인 벧엘을 떠 올리게 하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에서 “인자” 칭호는 예수를 새로운 성전의 형태를 표현한다. 왜냐하면 야곱이 그 환상을 보고,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고 말하고, 거기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으며 벧엘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이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한시적 의미의 성소였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로고스는 ‘새로운 벧엘’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고스인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고스의 거하심은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새 창조적 새로운 성전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굳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디서나 하늘과의 연결이 가능한 항구적인 새 성전에 거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예시가 될 수 있는 성전 정화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의 궁극적인 운명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말씀한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며 새로운 성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제시한다. 즉 요한은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사역으로 새 창조적 건축으로 새 성전이 이루어질 것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로고스는 이러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고 선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예배할 곳이 어디인지 묻는 물리적 장소로써의 성전에 대한 물음을 참된 예배의 주제로 전환 시키며, 성전과 참된 예배의 비밀을 푸는 그 예언의 성취로 자신을 선언 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5-26). 또한, 성령을 지니신 분이시요(요 3:34), 구약 성경의 약속을 다 이루신(요 19:28)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이 증거하고자 하는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새로운 성전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개역개정에서 “거하시매”로 번역된 헬라어는 ‘천막’에서 파생된 동사로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 ‘거처를 정하다’, ‘살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만 나타나는 요한의 언어 중 하나이다. 또한 여기서 장막에 거함으로써 광야 시대를 기억하던 ‘초막절’(요 7:2)도 파생되어 나타난다.
성막의 모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장막을 지으라는 명령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 29:42) 말씀하신다. 이때 회막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증거의 장막”(행 7:44)으로서 여호와의 영광으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출 29:43-45).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시매” 즉 “장막을 치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장막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시고 그의 백성을 만나기 위한 장소였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새로운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장막이 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거하시매”의 헬라어 동사 ‘스케노오’는 히브리어 ‘샤칸’의 음역이다. ‘샤칸’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 한동안 머무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샤칸’으로부터 파생된 명사가 ‘쉐키나’이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현현에 뒤따르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이다. 구약에서 ‘쉐키나’에 대한 두 가지 핵심 상징은 출애굽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앞서가시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신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기둥’이다(출 13:22).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인도와 보호를 위하여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또한,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고 난 후에 구름이 내려와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 이었더라” (왕상 8:11). 구름에 싸인 여호와의 영광 ‘쉐키나’는 신의 현현에 뒤따르는 눈에 보이는 현시로서, 구약 성경에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요한은 이 ‘쉐키나’를 성육신하신 즉,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칭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쉐키나’는 원형인 하늘 성소가 이 땅 위에 육체로 장막을 치고 그 위에 하나님 영광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의 성육신은 구약 ‘장막’의 완전한 성취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늘 성소의 원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이 ‘쉐키나’는 아버지로부터 온 유일하신 ‘아들의 영광’(요 1:14, 5:37, 10:42)이다.
정리하면 요한복음 1:14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 모형의 성취로 고백하는 증인들의 고백이다. 즉 구약의 계시 안에서 사람들이 성막과 성전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쉐키나’의 영광이 되어 믿는 자들을 영원한 안식 즉 생명(요 20:31)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장막으로 ‘계시’ 되었음을 찬양하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