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20년 독자의 단상

남섬오지까지 배달 온 크리스천라이프가 영적인 밥상돼

신문 펼치는데 5명이 30분 걸리고 세로 길이는 196m이고 52kg 나가

크리스천라이프 창간20주년을 맞이해서, 신문 창간호부터 491호까지를 전부 보관하고 있다는 이유로 원고를 부탁 받고 글을 쓰기 위해서 이사 다니던 종이 박스에 고이 담겨있는 신문을 꺼내서 다시 보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그 안에 글을 쓴 필자들과 신문을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신문사가 노스코트에서 로즈데일로, 그리고 블록하우스베이로 이사해서 가라지에서 작업할 때 가끔씩 들리면, 좁은 글 감옥인 차고에서 마치 중세 노예선의 배 밑창에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던 노예들처럼 각자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열심히 글들을 다듬고,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편집을 마친 마지막 원고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고 비로소 밖으로 나와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큰 기지개를 켜던 사명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곳에서 인고의 세월을 지켜낸 장명애 대표, 이승현 발행인, 임형지 디자인실장, 그리고 열심이던 교열 봉사자들…. 저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배달의 기수와 요즘 같은 세상에 종이신문을 구독해 주신 애독자의 뜨거운 성원이 크리스천라이프의 오늘이 있게 했음을 확신한다.


신문사는 단지 작업 공간만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일로 누구라도 방문하면 바쁘게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을 멈추고 반갑게 맞아주던 고향 같은 곳이다. 한국전쟁 후 많은 문인들이 종로의 다방에 모여서 인생을 논하고 그곳에서 얻어지는 영감으로 글을 썼다고 했는데, 신문사도 글만 아니라 따뜻한 정을 늘 나눠주던 곳이었다. 그곳은 내가 10여 년의 남섬(블레넘) 사역을 마치고 오클랜드에 복귀해서 예약 안 하고 갈 수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신문사는 정말 좁은 공간이었었지만 그 안에 정은 가득했다. 늘 한쪽 간이 테이블에 커피와 한국 과자는 언제나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런 한결 같은 마음이 신문의 20년을 지켜 왔는지 모른다.


이러한 저분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신문을 통한 아련한 추억이 있기에 신문 한부 한부가, 저분들만큼은 못하겠지만 나에게도 쉽게 버리거나 버릴 수 없는 애장품이 되었는지 모른다.

신문 꺼내 보며 지난 시간 회상해 보는 나만의 쏠쏠한 재미를 느껴
김정운 교수가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서 추억이 되는 물건이 별로 없어서 삶이 풍성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특히 대한민국의 불행한 세대의 남자들은 성공이라는 공통된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쉼없이 달려 왔기에 개인 삶의 풍성함이 없어서 만나면 서로 이야기가 금방 끊긴다. 기껏해야 군대이야기, 정치이야기, 라때이야기, 그리고 서로 들어주지 못하고 자기들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일방적으로 자기의견을 관철 시키려다가 아슬아슬하게 대화의 자리는 끝이 난다. 참 측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언제나 자기 삶이 아닌, 조직과 제도 안에서 타인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던 노병들은 이제라도 자기주장, 자기 삶을 찾아보려고 서투른 고집을 부리다가 서서히 꼰대가 되어 간다고 하는 말에 많이 공감이 간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신문을 바닥에 줄 맞춰서 펼치는 데만, 그것도 몇 사람이 도와줬는데 30분 이상 걸렸다. 길이를 세로로 펼쳐서 계산해보니 196m였고, 다시 박스에 담고 저울에 달아보니 전부 52kg였다.

196미터
20년 동안 이사를 다니면서 52 kg로 늘고 3박스가 된 크리스천라이프

남섬오지까지 배달 온 크리스천라이프가 영적인 밥상돼

이민 35년 동안 이사를 29번 했으나 20년치 신문은 버리지 못해

도와주던 사람들도 신기해 하면서도, 요즘 말로 돈 안되는 일을 왜 하지?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안될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일수록 저장강박증을 겪을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저장강박증은 물건의 필요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물건이든지 버리지 못하고 저장해 두는 강박장애의 한 가지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저장 만을 위해서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것이 아니니 저장강박증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저장 아닌 소장의 즐거움,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나에게는 분명히 있다.


내가 이민자의 한사람으로서, 또한 목회자의 한사람으로서 크리스천라이프의 뉴질랜드 이민 교회역사와 라이프(교민역사)의 역사가 이 지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신문을 꺼내 보며 지난 시간을 회상해 보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로 되돌아 간 것 같은 나만의 쏠쏠한 재미는 내가 느끼는 기쁨 중 하나다.

한인 교회사의 귀중한 자료를 활자로 볼 수 있어
기억은 기록을 못 이긴다고 한 어느 카메라 회사의 광고문구처럼, 만약 기억만 했다면 가물가물 했을 뉴질랜드 한인 교회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지금도 종이 신문 위에서 활자로 볼 수 있다는 게, 많은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 되기도 한다.

남섬 블레넘과 북섬 웰링턴 그리고 오클랜드까지 크리스천라이프 20년치를 소중히 모아와


물론 요즘은 조그만 핸드폰 하나로 많은 디지털 정보를 열어 볼 수 있는 편리함이 있지만, 종이로 된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손끝에 와 닿는 종이의 감촉, 이런 아나로그적 감성이 주는 기쁨을 요즘세대들은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60년대 초등학교(라때는 국민학교) 갓 입학해서 처음 받아 본 국정 교과서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잉크 냄새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때는 책을 받자마자 지난 달력을 찢어서 표지를 싸서 보물처럼 사용하다가 후배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했다.


이런 추억을 갖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연식이 어느정도 된 것 같다. 그래서 측은하다고 정부에서는 작년부터 연금을 보내준 것 같다.


나는 좋아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누군가를 힘들게 했는데, 그 민폐가 심한 이유가 1990년 4월 1일부터 시작한 이민의 시간 35년 동안 이사를 29번 했으니 적은 횟수는 아닌 것 같다.


목회자들은 유독 책이 많아서 힘이 많이 들고 그다지 가성비가 좋지 않은 고객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2층 서재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던 정말 힘 좋게 생긴 남태평양 사람들의 입에서 지~스(Jeez)가 자동으로 흘러 나왔다.


그럴 때마다 시원한 음료수와 미안하다는 말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면서 한번 한번 거사를 치르고 오늘까지 잘 살아 남았다. 아마 자격증 제도가 있었다면 이사짐 쌓는 면허증은 벌써 땄을 것이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바로 앞에서도 당당하게 고백한 야곱처럼 힘들었지만 잘 견뎌온 것 같다. 우리의 모든 이민 삶이 어쩌면 야곱이 벧엘땅의 돌베개에서 잠이 깨었을 때 천사가, 정처없이 길 떠나는 야곱에게 언제나 보호해주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처럼,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셨기에 오늘이 있고, 앞으로의 시간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 것이다.

나눠 주는데 급급하다 보니 영적인 고갈이 찾아와
신문을 버리지 못하고 힘들게 끌고 다녔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목회 사역에서 오는 강박관념(트라우마?)에서 기인 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족은 2004년 7월 남섬에 있는 블레넘(Blenheim)이라는 그 당시 아주 생소한, 인구 2만의 소도시로 사역지를 임명 받고 갔다. 그곳에서 8년 반을 사역 하면서 참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도시(타운) 전체가 포도밭이라 많은 청년들이 짧게는 1-2주에서 길게는 3개월(그 당시 법)을 Working Holiday Visa로 왔다가 Seasonal Work를 마치면 떠났다.


우리가 사역하는 동안 특별추가사역으로 매주 토요일 저녁 약 120명의 세계각국의 청년들과 International meeting을 가지면서 식사를 대접하며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제를 했지만 언제나 그들을 떠나 보내고 난 후 허전함은 늘 우리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해서 사는 교민들은 늘 푸념으로 정 주지 말자가 구호였다.


언제나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눠 주는데 급급하다 보니 영적인 고갈이 찾아왔다. 그때 남섬오지까지 배달되는 크리스천라이프는 풍성히 차려진 영적인 밥상이었다. 이런 고마운 벗을 쉽게 버려지지 않아서 한부 한부 보관하다 보니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는 언제나 쉽게 교회를 떠날 수 있어서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야속했다. 어쩌면 우리가 길게 기다리지 못하고 눈앞의 손익 계산서에 따라서 쉽게 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물건 하나 버리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나 혼자서 붙들지 못하지만 물건은 내 의지에 의해서 붙들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0년 동안 함께 한 믿음의 장로와 권사 가정에 감사해
요즘 같은 시대에도 못난 목회자를 떠나지 않고 섬겨주신 성도들이 고마울 뿐이다. 그 중에서도 20년 동안 블네넘에서 처음 만나서 오늘까지 한결같이 옆에서 도와 주고 계신 믿음의 장로와 권사 가정을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자랑하고 싶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오직 내가 가진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을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빌어주고 싶다.


권석천의 사람에 대한 예의 중에서 “만남의 이유가 이별의 이유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냉철 해 보여서 좋았는데 날카로움에 베일 수도 있고, 열정적이어서 좋았는데 감당하기 벅찰 수도 있다는 모순 말이다. 결정적인 이별은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 진다고 했듯이, 사소한 사건이지만 그 조그만 사건 안에 우리 모두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물건 이든 사람이든 버리고 나서 아쉬워 하기 보다, 지금은 조금 수고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귀한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종이 신문이 힘들다고 해도 헤쳐나갈 길을 주실 것 믿어
다시 한번 크리스천라이프 20주년을 축하하고, 요즘 종이 신문이 힘들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헤쳐나갈 길을 주실 것이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응원한다.
크리스천라이프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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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