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맞닥뜨린 여러 다름, 예를 들면, 다른 문화, 다른 인종, 다른 교육 방식, 다른 시선, 다른 취미, 다른 가정 환경, 다른 믿음 생활 등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누구나 마주해야 할 세대적 다름 또한 우리에게는 큰 과제다.
이 수많은 다름으로 인해 우리는 다양함을 경험한다. 과연 이 다양함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수용하는가! 아니 수용할 수 있는가!
창조를 보면 하나님의 다양함은 어디에서든 증명되고 볼 수 있다. 물론 완전한 질서 안에 이 다양함은 아름답고 감탄할 만한 것들이다. 생명이 있어 그 수많은 다양한 창조물과 하나님의 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심히 기쁜 일이다.
서로의 다름과 다양함을 통해 마음이 열리고, 세계관이 넓어지면서 더욱 건강한 자아를 키워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더러는 주관자인 하나님보다 내 자아가 더욱 강하거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어 나의 기준을 더 앞세우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로 인해 세대 차이, 인종차별, 종교적 갈등을 겪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비교의 대상으로 보거나 지극히 나의 중심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차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대할 때, 거절당하거나 거부하거나 무관심으로 인해 관계에 있어 큰 벽이 쌓이게 된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자녀와 부모의 삶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오며 만들어진 각자의 다른 정체성이 확연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이 구축해 놓은 생각과 다를 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상처를 주곤 한다.
그렇다면 과연 가까운 가족이지만 전혀 다른 하나님의 창조물인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다양하심을 발견하고 존중하며 누릴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가족이기에 또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이해되며 존중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정체성부터 하나님의 뜻과 마음 안에서 계속해서 만져 지기를 힘쓰며, 서로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며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들의 뻔한 얘기 일지라도 들어주면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뻔히 돌아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기다려주며, 미움을 살 수 있는 결정이라도 과감히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작은 행동, 반응, 결정들을 계속해서 살피고, 수만 가지를 배우며 상상한다. 그렇다고 부모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이해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모도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고치려 하고, 때론 자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도 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혹여나 보여지는 부모의 냉소, 다툼, 또는 이혼의 과정이나 경험조차도 그저 넘기거나 숨기지 말고,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 가져가 기도하고 인도함을 받으며 승리로 이끌어 주심을 자녀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녀들은 아무리 성숙해 보일지라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고,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내 편을 만드는 상대가 아닌, 미숙해서 저지른 실수나 어쩔 수 없는 실패 가운데서도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진리가 묻어난 삶의 고백을 지혜롭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경험을 토대로 한 추측과 판단으로 새로운 정체성으로 형성된 자녀를 양육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맺어준 부부가 그렇고 모든 관계가 그렇듯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임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의 모습이 비친 다양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귀히 대해야 한다. 그럴 때 자녀들도 어느새 어떤 문제에 봉착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귀한 자녀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크리스천에게는 꽤 어려운 문제로 거론되는 성소수자의 삶을 살펴보자.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성소수자와 관련된 문제는 이제 가까운 친구나, 가정, 영화, 드라마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학교와 교회에서 수년간 일하며, Gender Issue, Trans Gender, 또는 Coming out 등을 접해왔다. 사실은 조금의 관심만 가지고 살펴보아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얘기였지만, 그만큼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겨 무시하거나, 멀리한 것이지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왔던 문제다.
실제로 최근에 뉴질랜드 오클랜드가 세계에서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어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필자의 교회는 오클랜드 시티의 Karangahape road에 있는 한 카페에 있다. 일명 K-road는 거리 바닥과 전봇대에 걸쳐진 깃발들이 모두 무지개 색을 강조하며 성소수자 중심의 이벤트를 자주 열고, 성소수자의 거리임을 강하게 드러내는 곳이다.
교회라는 문턱을 낮추고 누구든 들어와 예배할 수 있도록 카페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카페 주인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교회라는 간판을 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카페 주인이 10년 넘게 이 범죄가 가득하고 사건사고가 많으며, 낙후한 K-road에서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고용을 창출하는 등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꽤 좋아지고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교회에 대해 상처 정도가 아니라, 어마무시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교회 성도들과 함께 크리스천으로서 성소수자들을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깊이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과연 크리스천으로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성소수자의 다른 자세와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은 성경에 위배됨으로 변화되기 전까지 교회에서 인정하거나 받아줄 수 없는 것인가? 심지어 그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아니면 멀리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아는 교회는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획일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그 진리를 찾아 참 자유케 하는 곳까지 열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저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단순히 상대의 다양성을 마냥 존중해주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세가 아닌, 진정한 관심의 결여나 편한 길만 찾고자 하는 자세는 아닌지 고민해 보자.
사랑이라는 것이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 그저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또한 단순히 말씀에 위배된다고 해서 보이는 모습에만 초점을 맞춰 정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해서 전달하지는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은 가정환경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이외에도 위에 명시한 여러 다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다름을 통해 혼란을 겪으며 정체성이 잘못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나 스스로가 될 수 있고, 내 자녀나 부모,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잘못된 선택이나 실패로 치부하기에는 주변 환경의 영향이 크고, 또한 창피해하며 감출 문제가 아닌, 서로 나누며 아픔을 호소하고 진리를 찾기에 함께 힘써야 한다.
나같은 죄인에게도 다가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살려주신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은 최소한 나는 그런 종류의 죄를 지은 죄인은 아니었다는 자세가 아닌,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으로 매일을 살아가고 숨쉬고 있는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 그 사랑을 전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전하면 전할수록 배가 되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어떤 죄악도 능히 이기는 생명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대가 변했다고 진리가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각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다양성을 적용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힘쓰되, 내 문화와 내 세대적 기준의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판단하는 우려를 범하지 않을 수 있도록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대 속에서 나의 세대만 고집하는 것이 아닌, 여러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또는 두려워하며 회피할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살아있는 진리가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어져야 하는지, 하나님의 다양함을 알아가야 한다. 분명 이 과정에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요구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되는 참 기쁨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