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진영 목사의 살아온 발자취

나명균 목사<조은교회>

고 김진영 목사는 1930년대에 한국 경북에서 태어나 1960년대 뉴질랜드에 원양어선이 진출할 때 외항선 선원으로 2차례 뉴질랜드를 방문했고, 1970년대에 한국인 최초로 항해사 취업 이민을 왔다. 1980년대에는 스미스 사관과 함께 웰링턴 국제선원 회관에서 한국 원양어선 선원을 돕고 최초 웰링턴 한인연합교회 설립에도 함께했다. 1990년대에는 타우랑가에서 선원 선교와 타우랑가와 로토루아 및 네이피어 갈릴리한인교회를 설립했다. 2000년대에는 로토루아 갈릴리한인교회에서 은퇴하고 로토루아 한글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2010년대에는 타우랑가와 티마루에서 외항선원 선교를 했다. 그리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2022년 8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37. 7. 13. 경북 상주군 회동면에서 출생

1960, 1967. 외항선에 승선하여 뉴질랜드 방문

1962. 10. 25. 경기도 평택 출신 안산분과 결혼

1974. 6. 5. 한국인 부부 첫 번째로 뉴질랜드에 항해사 취업 이민으로 헤스팅 정착

1983. 12. 웰링턴에서 30년 만에 다시 예수를 만나고 아내 안산분도 예수 영접

1984. 2. 1주일에 2번씩 웰링턴 국제선원회관에서 한국 원양어선 선원위해 자원봉사 및 주일예배시 스미스 사관을 도와 한국선원 예배드려

1984. 3. 11. 뉴질랜드 최초 웰링턴 한인연합교회(스미스 사관) 설립 도와

1990.2. 타우랑가 항구에 갈릴리미션센터 오픈하여 외항선원 선교 시작하고 타우랑가 갈릴리교회 설립

1993. 10. 로토루아 갈릴리한인교회 및 네이피어 갈릴리한인교회 설립

2002. 5. 갈릴리한인교회 은퇴와 함께 타우랑가 및 티마루 선원선교 활동

2004. 사랑실천장학회 설립하여 차세대 정체성 교육 도와

2006. 4. 로토루아 한글학교 교장으로 7년 봉사

2013.5. 로토루아 갈릴리한인교회 설립 20주년 기념예배에서 원로 목사 추대

2022.8.28. 하나님의 부름을 받음 <이승현 발행인 정리>

<고 김진영 목사와 고 안산분 사모>

작은 빛으로 오더니, 큰 빛이 된” 김찐영, 수더분’ 그들이 그리울 때가 많다

한국전쟁 이후로 지금까지의 재뉴 한인 이민의 산증인으로 고 김진영 목사를 가려 꼽을 수 있다. 그의 삶을 조명해 보면 뉴질랜드에서 살아온 한인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보인다. 김진영 목사와 함께했던 나명균 목사의 이야기를 독자와 나눈다. <편집자 주>

밀레니엄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썩하던 2001년, 가랑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이었다. 로토루아 갈릴리한인교회를 목회하시던 김진영 목사님이 나를 한번 보자고 연락이 와서 날을 잡아 로토루아의 목사님 사택에 들어서면서 짙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가 오는 탓에 유황 가스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택에 들어서니 벌써 식탁에는 점심이 차려져 있었다. 병아리콩(chick bean)을 넣은 밥에 말린 근대를 불려 볶아놓은 나물 반찬과 껍질째 구운 연어가 차려진 식탁에서 고소하면서도 정겨웠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벌써 24년 전 일이다.

김진영 목사의 어린 시절


김진영 목사님은 65세를 맞으며 은퇴하고자 한다며 목회 자리를 나에게 맡아 달라고 하셨다. 그가 타우랑아 갈릴리한인교회를 비롯하여 내이피어, 로토루아에 갈릴리한인교회를 세워 목회한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김진영 목사님과 연을 맺어 교회의 청빙 절차를 따라 갈릴리한인교회 2대 담임으로 부임, 목회하게 된 것이다. 나도 십수 년 후, 로토루아 갈릴리한인교회 사역을 마치고 오클랜드로 올라왔다.

훗날 안산분 사모님이 위독하시다고 하여 로토루아 병원으로 찾아 뵙고, 이튼날 아침 부음의 소식을 들었다. 우리 부부가 마지막 방문자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리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김진영 목사님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로토루아로 내려가 김진영 목사님을 천국으로 환송하는 예배를 집례하고 오클랜드로 올라와서도 내 스마트폰 전화번호 목록에서 김진영, 그의 이름을 지운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뉴질랜드 동포사회의 밑거름으로
김진영, 그의 이름이 뉴질랜드의 우리 한인 동포사회에서 기억되는 것은 1974년 뉴질랜드 정부가 그를 공식적으로 첫 이민자로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직업이 항해사였던 김진영은 한국과 일본의 상선을 타고 이미 1960년, 1967년에도 그는 뉴질랜드를 방문했었다. 그때 운명과도 같이 만난 사람이 리차드 메이슨(Richard Mayson)이었다. 1967년 오클랜드(Auckland)에서 만났던 그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1974년 김진영을 뉴질랜드로 초청하여 한인으로서는 정식 뉴질랜드 이민자로 초청했을 때는 해스팅스(Hastings)의 지역 국회의원이 되어 있었다.


그날 리차드 메이슨은 김진영, 안산분 부부를 향하여 ‘뉴질랜드의 공식적인 한국인 이민자이며 나의 친구들’이라고 반겨주었다. 김진영의 아내 안산분 사모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해스팅스(Hastings)에서의 삶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자전거 조립 공장에서의 일, 과일 농장에서의 일 등의 온갖 이야기에는 외로움과 고단함이 섞여 있음을 쉽게 느껴졌다.


김진영 목사는 사진 한 장, 작은 쪽지 편지 하나도 잘 보관해 놓는 매우 꼼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택을 방문하면 으레 이것저것 빛바랜 사진첩을 넘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안산분 사모 혼자 한복을 입고 추는 춤사위였다. 춤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 한국 문화를 알리고자 춤을 배워 부끄럽고 할 겨를도 없었다고 하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하며 눈에는 눈물이 고이면서도 웃어대었다.

안산분 사모의 한국고전무용은 해스팅스(Hastings)는 물론 파머스톤 노스(Falmerston North), 웰링톤(Wellington), 타우랑아(Tauranga), 로토루아(Rotorua)까지 젊은이들이 모인 대학에서 무역박람회장, 선원들의 위로 현장과 양로원 등에서도 이어졌다. 이들 부부는 뉴질랜드와 동포사회의 밑거름이자 문화적 가교자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이다. 그러나 김진영에게는 뭔가 꼭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운트 망가누이에서 국제선원 선교해

외항 선원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로
그렇다. 자신이 지난날 선원으로서 받은 사랑에 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김진영 목사는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어디 김진영뿐이랴? 부모 형제를 떠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김진영을 뉴질랜드로 오게 한 곳도 항구마다 있는 선원들을 위한 선교회관(Mission Center)이었으니, 그곳은 세계 각국에서 오는 선원들에게는 그야말로 안식처였다.


김진영 목사도 1960년대 항해사로 두 번 뉴질랜드를 방문하였을 때, 선원들을 위한 미션 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김진영은 1984년 2월부터 웰링턴(Wellington)의 국제선원회관(British Sailor’s Society)에서 자원봉사와 운영위원으로 선원선교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이틀을 밤늦은 시간까지 사역했고, 주일에는 한국전 군목으로도 수고했던 스미스(Smith) 목사를 도와 선원들과 함께 주일예배도 드렸다. 이것은 김진영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회복이 아닐 수 없었다. 6.25 한국 전쟁 중, 어린 중학생 시절 교회에서 받은 상처로 교회를 떠난 지 꼭 30년 만에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김진영 자신에게는 회복이요, 아내 안산분은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축복이었다.

뉴질랜드 동포사회의 영적지도자로
모든 사역은 한가지로 끝나지 않고 더 나은 사역으로 이어진다. 퍼시 스미스(Percy Smith) 목사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국제선원회관 사역은 당시 한국 원양어선의 전진기지였던 웰링턴에서 뉴질랜드 최초의 한인교회가 설립되는 감격스러운 일로 이어졌으니 1984년 3월 11일 주일이었다. 이듬해는 퍼시 스미스(Percy Smith) 목사와 20여 명의 교인이 서명하여 정식으로 웰링턴 한인연합교회(Korean United Church of Wellington)가 법인단체로 등록되고, 1985년 10월에는 김용환 목사가 한국에서 파송을 받아 사역을 시작했다. 이즈음 김진영에게도 또 다른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다.


김진영은 이를 계기로 주님의 종으로 사역하기로 결심하고 만학도의 신분으로 신학의 길에 접어들었다. 호주와 한국에서 신학수업을 마치고 마침내 50대 후반에 접어들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타우랑아(Tauranga)의 세인트 앤드류교회(St. Andrew’s Church)에서 갈릴리한인교회 설립을 시작으로, 로토루아(Rotorua), 네이피어(Napier)에도 갈릴리한인교회를 세워 지역의 한인 영혼들의 목자가 되어 65세 은퇴하기까지 선원선교와 한인들을 위한 목회를 이어나갔다.
나는 이즈음 김진영 목사님과 만나 그의 사역을 이어받아 로토루아 갈릴리한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갈릴리한인교회는 김진영 목사의 의지를 존중하여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와 더니든 사이에 있는 티마루(Timaru)로 선원선교를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티마루는 한국 원양어선의 선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990년 대에 침례를 인도하는 김 목사

뉴질랜드 동포사회의 교육자로
김진영 목사와 아내 안산분 사모는 티마루의 선원선교 사역에 어려움이 있어 다시 로토루아로 돌아왔다. 조용하고 차분한 그의 성격이 또 한 번 빛을 발할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한글학교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활동이 시작이었다. 로토루아의 한글학교도 처음에 갈릴리한인교회에서 시작한 사역으로 목회 현장에서 은퇴한 김진영 목사에게는 매우 애착이 있는 사역이었다. 이후 7년 동안, 손주 같은 아이들을 정성스레 돌보며 선생님들과 귀한 사역을 펼쳐 나가며 장학사업도 펼쳐 나갔다.

내가 경험한 김진영, 그리고 안산분
나는 김진영 목사의 사역지 갈릴리한인교회 제2대 담임으로 청빙을 받아 13년 가까이 사역했다. 그 세월 사이, 그 만남의 사이에 애증(愛憎)도 많았다. 그의 말년에 치매로 많이 고생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눈물도 함께 흘렸다. 내가 다른 이의 인생을 논한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김진영은 ‘지독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 시절 지독하리만큼 고생도 많이 했고, 아픔도 경험한 사람이었다. 지독하리만큼 자기 인생을 정리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만났던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독하리만큼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려 했고 고마움으로 답하려 했다.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지독하리만큼 간직하고 귀중하게 여겼다. 또한 지독하리만큼 청렴하게 정직하게 살고자 애쓰고 나눔의 삶을 살았다. 한 번은 어느 성도로부터 자동차 운행을 위해 주유소 100달러짜리 주유 카드를 한 장 받으셨다고 반씩 나눠 쓰자고 했다. 또한 지독하리만큼 그의 교회 사랑하는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2005년, 로토루아에 갈릴리한인교회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었는데, 예배당 공사를 마치고 나와 김진영 목사는 기념식수를 하였다. 김진영 목사가 직접 싹을 틔워 키운 종려나무 몇 그루였다. 이제는 그 종려나무가 교회 입구에 잘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또한 그의 신앙은 바울만큼이나 지독하리만큼 십자가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로토루아에서의 가족 사진

본인은 치매 상태에서도 아내 안산분 사모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고 먼저 간 아내를 생각하던 지독하리만큼 인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도 그렇고 김진영 목사도 그렇고, 사람이기에 사람만이 앓은 병으로 고생했다. 내가 그를 생각하며 말한 ‘지독하리만큼’이라는 표현 때문으로 인한 아픔이기도 하다. 자기 인생을 세상 사람들 하는 대로 똑같이 사는 사람은 앓지 않는 병, 아픔이다. 그를 모르면 모르겠지만, 그를 아니 그가 얼마나 귀한 영혼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가 목회하면서 지독하리만큼 사랑했던 성경 구절 하나가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 말씀이다. 이 말씀은 평생 그의 목회관을 잘 보여준다. 그의 목회에는 ‘세상의 빛이 되는 교회’라는 표어가 은퇴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후임 목사들의 목회관에 따라 교회 표어가 바뀔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 표어만큼은 바꾸지 못할 정도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었다.

김진영과 안산분을 나는 이렇게도 기억하고 싶다. ‘김찐영, 수더분’ 그들이 그리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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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