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80년, ‘실로암 비문’이라 불리는 고대 유물이 예루살렘 성 남동쪽에서 발견됩니다. 비문이 발견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해 여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어린 아이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물이 흘러나오는 지하터널 안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용기내서 들어 갑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6미터가량 들어갔을 때, 터널입구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으로 인해 벽에 새겨진 낯선 문자, 고대 히브리어로 작성된 글을 보게 됩니다. 마침내 주전 700년경에 새겨진 실로암 비문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입니다.
히스기야 수로의 개통 순간을 기록하고 있어
이 비문은 실로암 터널, 일명 히스기야 터널이라 불리는 수로의 개통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 굴착공사를 지시한 사람은 남왕국 유다 왕 히스기야입니다. 앗시리아 군대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블레셋 해안 도시들을 점령한 후에, 이제 그 전쟁의 칼 끝을 남왕국 유다로 돌립니다. 형제 국가였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침략에 맞서 사마리아 성 안에서 버티며 싸웠지만, 3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남왕국 유다 역시 앗시리아의 전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했던 동일한 전략을 세웁니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 성 안에서 버티기 작전에 들어간 겁니다. 이제 시급하게 준비해야 되는 것은 식수입니다. 장기전을 대비해 성 안에 있는 유다 백성들이 물부족 난을 겪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인부들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앗시리아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예루살렘 성 밖 기혼 샘(Gihon Spring)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수로를 통해 성 안으로 끌어오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 날의 감격을 비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 수로 … 그리고 이는 뚫은 방법이었다. 서로를 향해서 파들어 갔으며, 3규빗 (1.3 미터) 쫌 남았을 때 … 반대편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 … 동료를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른쪽 바위에 균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사람이 동료를 향해, 곡괭이가 곡괭이를 향해 파갔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 물이 샘에서 연못까지 1200규빗(525 미터) 흘렀다. 석곡의 머리 위 바위의 높이는 100규빗 (50미터)이었다.”
여섯 줄로 기록된 비문은 200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직 177자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인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스스로 많이 놀라고 감격스러웠을 겁니다. 이들이 팠던 땅은 부드러운 흙이 아니었습니다. 석회암으로 구성된 단단한 돌산입니다. 제대로 된 굴착장비도 없이 곡괭이와 삽 만으로 조금씩 바위를 쪼개며 땅 밑으로 들어갑니다.
성경 기록의 정확성과 정보의 신빙성이 입증 돼
오늘날이야 핸드폰도 있고 무전기도 있어서 지하에서 얼마든지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고대사회에서는 몇 사람들이 갖고 있을 법한 뛰어난 청각 외에는 변변한 통신 장비가 없습니다. 방향감각이 있을 수 없는 땅 밑에서 오직 느낌만으로 앞을 향해 이동했을 겁니다. 땅 속 깊은 곳, 어느 중간 지점에서 아직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가로 막혀 있던 중간의 벽이 뚫리면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득했을 겁니다.
물론 비문이 전하고 있는 건, 공사를 담당했던 인부들의 소회만이 아닙니다. 실로암 비문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인부들의 만남이 기쁨으로만 끝나고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면, 실로암 연못에 고이는 물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거라 믿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열왕기하 20장, 역대하 32장, 그리고 이사야 2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 밑에 존재했다는 지하수로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 검증이 불가능한 종교적 주장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문으로 말미암아 성경 기록의 정확성과 정보의 신빙성이 입증되었습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거의 2800년 전에 기록된 글이지만, 비문의 내용을 읽다 보면, 남왕국 유다의 평범한 백성들이 앗시리아 대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의 조국을 얼마나 지키고 싶어했는지 여전히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기록은 다른 시간대를 사는 전혀 다른 두 세대를 이어주는 통로가 됩니다. 아울러 상관없는 두 세대가 만나 깊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한강
이런 일은 최근 한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소설가 한강씨는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중의 하나로 꼽히는 맨부커 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작년 10월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녀의 「소년이 온다」을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밝히면서 대한민국 작가로는 최초로 그녀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합니다.
연도.저자 .주제별로 총망라되어 있는 기록물은 과거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가 교감하며 현재의 사람을 돕고 살리게 될 것 스웨덴 스톡홀룸에 마련된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말합니다.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 온 학살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 1980년 오월 당시 …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를 보여주는 기록이 산 자를 살릴 수 있어
2024년 12월 3일, 저녁 10시 23분. 전시도 아니고 국가 비상사태도 아닌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제주 4·3사태 그리고 5·18민주화 운동,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모두 비상계엄과 함께 일어난 비극들입니다. 역사적 악몽이 우리들 안에 존재했지만,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국회로 갑니다. 두려움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숨겨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광장으로 나온 겁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 그리고 장갑차 앞에서도 비폭력으로 저항합니다. 그리고 4일 새벽, 계엄선포 6시간이 지난 후, 비상계엄은 해제됩니다. 혹자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엄밀하게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보여주는 기록이 산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기록이 없다면, 불행은 충분히 반복됩니다. 이미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기록을 통해 우리 모두는 생생하게 그 고통의 날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대의 아픔이 현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픈 역사가 반복되자 않도록 그 추운 한 겨울 밤, 군용 헬기가 굉음을 내며 상공에 떠있고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 창문을 부수어도, 시민들이 밖으로 나온 겁니다. 폭력 앞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가족과 친구에 대한 기억, 그 같은 죽음을 목격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숨김도 가감도 없이 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적어 놓은 기록. 이것들이 한데 모아졌을 때, 산 자들은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 공간에 축적된 기록이 실로 방대하고 엄청난 시간의 무게로 느껴져
<크리스천라이프>를 퇴사하고 거의 20년 만에 신문사를 찾았습니다. 그 곳에는 히스기야 터널에 새겨진 실로암 비문과 같은 유물은 없었고, 그리고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현장과 같은 화려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얀 벽을 가지고 있는 작은 평수의 그 공간에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 축적된 기록은 실로 방대했습니다. 연도별, 저자별, 그리고 주제별로 총망라되어 있는 기록물은 작은 평수와 상관없이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그 기록들은 뉴질랜드라는 매우 특별한 context 안에서 한인 교회 목회자들과 한인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이 일궈 낸 뉴질랜드 사역의 text였습니다. 신문사 방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저는 앞으로 이 기록이 산 사람들, 그리고 태어날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과거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가 교감하며 현재의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 믿을 수 있었습니다.
박세훈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및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C3TV(현 GOOD TV) 교양제작과 보도국 PD. 오클랜드 대학교 영상의학과 졸업 후 Ascot Radiology PET 부서에서 방사능 기사. 노스쇼어 한인성결교회 담임으로 이민 1세대를 위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