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언제나 나를 품어 주는 고국을 찾으며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는 정지용의 시 향수(鄕愁)에서 반복되는 구절이다. 시(詩)가 워낙 좋아 노래로도 작곡되어 모두가 애송하고 있지만 고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구절이 이국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러일으키는 그 애틋한 그리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 고국은 타향살이를 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힘들 때는 힘이 들어서, 기쁠 때는 기뻐서 고국 생각이 났다. ‘고개 들면 밝은 달이 보이고(擧頭望明月) 고개 숙이면 고향이 생각난다(低頭思故鄕)’고 읊은 이백(李白)과 같은 심정이 되어 멍하니 어두운 하늘을 우러러보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밤마다 책을 뒤적거리고 글을 끄적거렸고 그렇게 견디다 급기야 구월이 되면 더 이상 못 견디고 짐을 꾸려 고국행 비행기를 탔다. 구월은 내 고국의 가을이 시작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구월이 되면
고국을 떠나 이곳 지구 반대편 남반구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에 삶의 둥지를 튼 지 벌써 이십여 년이 넘었다. 하지만 구월이 되면 고국을 향하는 몸과 마음을 나 스스로 어쩔 수가 없다. 구월이 되면 이곳 뉴질랜드에는 햇살이 따뜻해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이 꽃향기를 실어오지만 내 가슴속에서는 이미 고국의 스산한 가을바람이 일렁이며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실어온다.

그렇게 한 잎 두 잎 실려 온 낙엽들이 가슴속에 쌓이기 시작하면 켜켜이 쌓인 낙엽들 사이로 지나간 과거의 추억들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고나온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도 보이고 그 골목길에 어둠이 내리면 전봇대 꼭대기에서 환히 빛을 내뿜던 가로등도 보이고 그 빛줄기 속으로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미는 옛 동무들 생각이 나면 나는 그만 새어 나오는 탄식을 참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해마다 구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고국의 가을바람이 일렁거리기 시작하고 나는 최면에 걸린 양 주섬주섬 짐을 꾸린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잡고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고국엔 모퉁이 모퉁이 내 추억을 되살려주는 정다운 구석이 있고 고국엔 언제 찾아도 날 반겨주는 형제들과 친구들이 있다. 그렇기에 고국은 고국을 떠나 있는 나에게는 언제나 사무침의 존재이다. 구월이 되면 그 사무침이 극에 달하여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고국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옛날 시성(詩聖)이라던 두보(杜甫)는 봄이 되어도 고향에 갈 수가 없어 향수(鄕愁)라는 시에서 ‘올봄도 또 이렇게 지나가니 언제 고향에 갈 날이 오랴(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라고 탄식했다지만 그에 비하면 비행기 표를 손에 들고 며칠 뒤면 고국에 도착해 고국의 가을을 만끽할 꿈에 젖어 있는 나는 너무도 행복하기만 하다.


이제 사흘 뒤면 고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는 이 저녁에도 내 가슴속에선 일렁거리기 시작한 고국의 가을바람이 점점 더 세차지고 있어 나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고국의 친구들과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이번에 가면 만나야 할 사람들과 들려야 할 곳들을 다시 챙겨보는 사이에 밤이 제법 깊어졌다.


그렇지만 가슴속 가을바람은 잠자코 있지를 않기에 나는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이미 고국의 어느 청명한 가을 들판에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아 바람이여 내가 사랑하는 내 고국의 가을바람이여 그 바람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나는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나는 허허로운 가을 벌판의 한 그루 나무이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잎사귀들을 떨구는 나무이다
잎사귀를 떨구며 잎사귀를 떨구며
나는 온몸을 활짝 비우고
내 안에서 여름을 보냈던 새들은 나를 떠난다

새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내 고국을 꿈꾼다
까마득한 그 옛날 가을바람을 타고 그곳에서
내가 날아와 여기 뿌리를 박았던
그 고국으로 나는 새들과 같이 날아가고 싶다

지금 이 허허로운 벌판
바람은 불고 내 가슴은 벌판보다 더 비어 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사귀들마저 떠날 몸짓을 하는 지금
나도 떠나고 싶어 한다
새들을 따라 바람을 따라
태어날 때부터 내 가슴속에 있는 그리운 고국으로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엔 더 큰 바람이 일렁거리고
바람보다 먼저 나는 허허로운 가을 벌판의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마지막 잎사귀마저 떨어지면
온전히 벗은 몸의 나를 끌고
나는 부끄럼 없이 옛날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
바람이 일렁이면 내 가슴 속에서 나를 부르는 곳
내 가슴 속의 영원한 고국

덧붙이는 말씀
사랑하는 뉴질랜드 교민들께
윗글과 시는 제가 뉴질랜드에 있던 2018년에 쓴 글입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던 저는 작년 3월에 귀국해서 지금은 고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일 모레면 추석이 되는 오늘 9월 15일 저녁 하늘에 뜬 밝은 달을 보다 들어와 이번 금요일까지 크리스천라이프에 보내야 할 글을 쓸 준비를 하다 몇 년 전에 썼던 이 글이 생각나 골랐습니다.

30년 가까이 뉴질랜드에서 살았기에 지금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시시때때로 뉴질랜드 생각이 나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오늘 저녁 하늘에 뜬 달을 보다가 문득 오클랜드 데본포트(Devonport) 바닷가에서 보던 달 생각이 나며 뉴질랜드에서의 30년 삶이 기나긴 장편 서사시(敍事詩)처럼 머릿속에 펼쳐졌습니다.

마음속으로 그 서사시의 각 연(聯)과 구절을 음미하며 저는 30년 긴 세월 동안 저와 제 가족을 받아주고 품어주었던 뉴질랜드에 감사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곳에서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두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 고국에서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뉴질랜드에 계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계획을 준비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고 여러분 모두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2024. 9월 한국에서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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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