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영화 소울 서퍼를 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 베서니 해밀턴은 하와이 출신 서핑 선수이고 주니어 프로 서핑 대회를 준비하며 서핑 기술들을 연습하던 도중 상어에 공격을 받는다. 2003년 사건으로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한 상황에까지 가지만 재활을 통해 빠르게 회복하고 각종 서핑 대회에서 수상한다.
또 다른 한 명을 더 소개한다. 아프리카 남쪽 해안에 사는 세넌 에인슬리는 두 마리의 백상아리에게 어택 당하지만 그도 역시 극적으로 살게 된다. 2000년 7월의 사건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세넌과 친구들은 2007년 23세의 나이에 꾸준히 해양 인명구조 활동을 한다. 서핑을 가르치고 누구보다 멋진 크리스천 서퍼로 사람을 살리는 일화들은 신앙이 있는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나 할 것 없이 많은 국내외 서퍼들 사이에 매우 유명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그들이 강해서 가능한 것일까? 베서니는 하와이에서, 세넌은 남아공에서 모두 십 대 때 겪은 일이다. 모두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다시는 서핑을 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그때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다시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지만 그들은 모두 신앙의 힘으로 회복했다. 베서니는 60%의 피를 잃었지만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 없다는 말씀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말씀에서도 극심한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팔을 잃은 것과 같은 공포! 다시는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바로 사랑하는 주님을 잃은 요한과 베드로가 그렇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이렇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요 20:6-10).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어부였던 베드로는 천한 삶을 살았다. 배나 그물에 이상이 생기면 어부 스스로 물에 들어가 직접 작업을 한다. 가릴만한 옷이 있지도 않았던 물고기의 비릿한 냄새 나는 천한 사람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스스로 부끄럽고 냄새나고 사회적인 위치는 천하디천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자신은 죄인이니 떠나달라고 한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사건 이후로 예수님의 발치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밀착해서 함께 지낸다.
상상해 보자. 늘 곁에 있었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웃고 전해 들은 말씀으로 눈물을 흘리며 깨닫고 감동하고 그렇게 동고동락한 시간이 3년 6개월이다. 관계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어 졌을까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도 가까이 따르다가 함께 잡혀갈 뻔하다. 모면하기 위해 세 번 강하게 부인한다. 도무지 모른다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피 하기도 한다. 난관이나 이에 따른 극심한 공포를 마주하기엔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드로가 한편 이해되는 이유이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마리아가 전한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에 가장 먼저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오히려 낙심한다. 어쩌면 희망을 품고 간 곳에서 완전한 절망만 가지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자신들에게 해 주신 말씀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절망스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혹은 잊어버리기 위해 다시 옛 일상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종종 그렇다. 옛 모습으로 옛 일상과 습관으로 어떤 이는 술로, 어떤 이는 오락으로, 어떤 이는 또다시 험담과 비난으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런 옛 삶이 편한 것이다. 이것이 성장에 있어서 오히려 멀리 돌아가고 반복되어 불편한 과정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절망으로 쓰러진 그곳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절망으로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다.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일으키신다.
베드로는 그렇게 옛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냄새 나는 어쩌면 지긋지긋했을 그물을 집어 들었다. 밤엔 잠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물만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생각할수록 더 복잡해지니 그냥 빈 그물만 올렸다 내렸다 해도 상념들을 털어낼 수도 없었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왔어도 몰랐을 것이다.
강가에 불을 피워놓고 뭔가를 굽고 있는 청년이 소리친다. ”뭘 좀 잡았습니까!” 짧게 대답한다. “아뇨!” 무슨 말이라도 더 할지 아니면 물질을 그만할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오간다. 또는 아무런 상념이 없이 단순노동을 반복하던 그에게 청년이 다시 이야기한다.
“그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보세요!!” 어쩌면 날이 새어 아침이 밝아오던, 그래서 그만 접으려던 그물을 “예, 그러죠.”하고 다시 잡고 내리는데 그물을 쥐고 있는 퉁퉁 부른 손끝에 153마리 물고기들의 힘찬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 그 뭔가를 굽고 있는 낯선 청년에게서 주님이 느껴졌다. 요한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한다. “주님이셔!!” 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거의 같은 타이밍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벗은 옷을 챙겨 입고 물에 뛰어 들어가 주님 계신 곳 해변으로 단숨에 간다. 디베랴 해변에서의 이야기이다.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다는 생각에 기쁨이 가득했을 그의 모습이 헤엄치다 걷다 이 물이 바다인지 내 눈물인지 하며 기쁨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렸을 사도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망에서 일으키신다. 거의 유사하거나 비슷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우리 안에 희망을 일으키시고 다시 소망을 갖게 하시고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다시 보드를 붙잡고 말씀을 붙잡고 일어난 베서니와 쉐넌처럼 일어서게 하신다. 반복적으로 다시 도전할 때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폭적인 지원을 명확하게 본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반복적인 만남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위한 우리에게 맞는 확실한 계획으로 우리에게 다시 또다시 찾아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성경 속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말 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일상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된다.
매일 아침 이러한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찾는다면 일상이 절망을 이기는 기적이 되고, 매일 아침 하는 말씀 묵상과 같은 신앙의 좋은 습관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숨을 고르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또한 갑작스러운 절망의 문제에 빠졌을 때도 살아남을 길을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주님을 잃었던 베드로와 요한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죽음을 뚫고 다시금 큰 파도를!! 거대한 물 벽을 타고 내려오는 서퍼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 독자들과 뉴질랜드 한인교회의 많은 신앙인들이 그렇게 일어나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