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ible is Game Changer

이민 연대기
1993년 5월 이민 와서 초창기는 미래를 계획하거나 기도를 하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우선 대학교에 다니며 학생수당을 받고 영어도 배우고 기술도 배워 볼 겸 학교에 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한 학기를 다녀보니 미래 취업에 대한 희망이나 비전이 보이질 않아 뭘 할까 고민하던 중 교회 지인이 패션 액세서리 소매점을 하고 있었는데 수입과 도소매까지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사업확장 제안이 들어왔다. 고민은 했지만 당장 적지 않은 월급과 사업 확장성에 매료되어 그 제안을 받아들여 학교를 그만두고 아내까지 총동원하여 이 액세서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내는 본인이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주어진 일에는 열과 성을 쏟으며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 비즈니스를 잘 해 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매일매일 매출을 올리는 데만 신경을 쏟았지 이 사업을 통한 비전이나 미래는 생각하여 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나는 가이드가 수입이 좋다는 말과 여행을 무료로 다닐 수 있다는 매력에 관광가이드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투자비 없이 가장 수입이 좋았던 이민자들의 직종 중 하나였던 가이드 잡은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 아웃도어를 즐기던 나는 지금도 이민자로서 특히나 뉴질랜드에서 가장 매력 있는 직업 하나를 말하라면 주저 없이 현지 가이드를 꼽을 것이다.

한국에서 오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서로를 소개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뉴질랜드의 자연경관을 만끽하고 뉴질랜드 정치사회와 역사문화를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부간 행사 시 통역 및 안내를 통하여 뉴질랜드와 한국간의 교류에도 적지 않게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일성수를 반드시 한다는 조건으로 시작한 가이드 일이지만 결국 영혼 없이 시작한 결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광야생활의 시작
이렇게 나는 가이드업으로, 그리고 아내는 액세서리 판매업으로 승승장구하며 이때 까지만 해도 이민생활이 잘 풀려나간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집도 하나 장만하였고 자녀들도 취학 연령으로 잘 성장하며 안정적으로 settle 되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던 그 찰나 IMF 가 오면서 우리의 이민 황금기는 끝나는 것처럼 여겨졌고 주님과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은 꾸준히 했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 중심은 초심을 잃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다고 후회되고 이때부터 우리 가정의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 뒤돌아보면 그 어려울 때에 나는 생각하기를 ‘어렵다. 안되겠다’라는 쪽으로 나의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들어올 돈이 없는데 하루를 어떻게 살아나갈까? 다음달 모기지는 못 갚을 것 같은데 은행에 어떻게 변명을 늘어 놓을까?’라는 등 긍정적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노력과 기도가 아니라 안 되는 쪽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을 했고 그 결과 결국은 생각한 대로 현실은 점점 더 나빠지고 가혹해졌다. 물론 이성적으로, 또 현실적으로는 냉혹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매사에 주님을 믿으며 기도에 전념하고 잘 될 걸로 생각을 바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 이후도 아주 어려운 상황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과거와 같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긍정의 힘을 믿으며 생각을 바꾼 탓에 그에 따라 오병이어의 기적과 여호와 이레의 예비하심이 종종 일어났으니 말이다.

The Bible is Game Changer
아이엠에프로 인한 경제적 쇠퇴로 집도 팔아야 했고, 렌트 집을 전전긍긍하고, 실업자 수당을 타며 일을 시작했던 것이 청소 업이었다. 물론 당장 가이드를 하고 싶었지만 관광객이 아예 끊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로컬 비즈니스였는데 가장 접근이 용이하였던 것이 청소였다.

Master Builder 자격증을 취득하면 모든 공사의 원청계약에 입찰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청소도 Master Cleaner 자격증이 있으면 큰 청소용역 계약 시 이런 자격증도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뉴질랜드 교육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master cleaner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한창 건축 붐이 일던 오클랜드 시내에 특히나 계약금액이 억대에 이르는 상업용 고층빌딩 청소 용역을 계약하기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같이 시작한 동업자의 교묘한 술책으로 결국 그는 나의 자격증을 이용하여 나 몰래 큰 청소용역 계약을 여러 개 성사시키고 나는 토사구팽 된 꼴이 되었다. 그것도 같은 교회 교인이었다. 물론 손해배상 청구 및 법적 소송으로 갈 계획까지 하였지만 그 동업자를 소개하여 주고 동업계약서의 증인까지도 하신 분이 목사님이시라 더 이상 문제를 키우면 곤란하여 지실 것 같아 거기서 멈췄다.

이때는 정말 사람이 얼마나 미웠던지 하루 종일 분에 겨워했고 복수(?) 할 생각만 묵상하였다. 그러다가 내 영혼이 너무 피폐하여져 갔는데 바로 새벽기도 때 주신 성경말씀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유학과 이민 삶의 Game Changer 가 되었던 것이다.

생각이 현실이 되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던 나에게 목사님은 이민 유학 사업을 권유했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업이다’ 생각하고 순종하며 시작한 비즈니스가 유학과 이민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동안은 대부분 그 순간을 모면하거나 버티기 위한 일을 도모하였다면 유학원 운영은 앞으로 내가 계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고 결국 지금까지 유학 컨설팅 비지니스를 20년 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 시작한 유학과 이민 사업은 유학원을 하면서 개별 학생유학안내와 그 당시 한참 유행이었던 어학연수 붐이 일었기 때문에 조기유학과 단기 어학연수가 참 많았다. 그러면서 장기사업비자란 제도가 생기면서 가장 많은 교민이 2002년 한일월드컵 전후로 뉴질랜드 한국 교민사회는 최고 호황기를 맞이하였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후배가 장기사업비자로 방과 후 보습학원을 하자고 해서 준비한 학원 사업을 비자가 기각되어 할 수 없이 떠 맡게 되었다. 학원 사업은 내 자녀에게 하나님이 주신 학업의 기회로 정말 ‘신의 한 수’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시크릿이 적용된다. 내 후배는 장사비자를 신청하면서 계속 ‘형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말을 계속 달고 살았는데 결국은 이민성 접수하기 직전에 장기사업비자 신청 요건이 강화되고 기각되어 끝내 오지 못하게 되었다. 즉, 안되면 어떡하냐고 생각한 게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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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길
연세대학교 졸업, 뉴질랜드 광림교회, 우리엔젯유학원 대표원장 / 대학진학 컨설턴트 / 교육칼럼니스트. 20여 년간 유학원을 운영하며 두 자녀를 모두 의과대학에 보내어 의사로 성장시키며 신앙과 교육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에피소드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