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가 메시지입니다

박용수목사<말씀의교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1~16)

같은 일을 해도 순서가 맞지 않으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밥 먹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손님보다 먼저 먹는 것은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 걷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보다 앞서 걸으면 아이 보호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Escalator를 탈 때도 아이가 먼저 타야 안전합니다.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을 탈 때에는 먼저 내리고 타야 합니다. 먼저 타겠다고 밀고 들어가면 서로 불편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주님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바른 순서가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지금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열매가 없다면 순서에 잘못이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순서만 바꾸어도 삶의 열매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서도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라는 단어에 익숙합니다. 오래전, 기독교 잡지가 있었습니다. 책 제호가 ‘빛과 소금’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서인지 잠시 폐간 후 잡지를 재창간하면서 제호를 ‘소금과 빛’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아 그런지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이 맞는 순서입니다. 주님은 먼저 소금이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그리고 빛이다”(마5: 13~14).

일반적으로 ‘소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썩지 않게 하는 것, 즉 ‘방부제’입니다. 구약 말씀에 익숙한 당시의 유대인들은 소금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매우 확실합니다.


. 정결함을 위한 썩음 방지 용입니다(겔 16:4).
. 약속이 떠 오르는 언약의 소금입니다(민 18:19, 대하 13:5).
당시 유대인들에게 소금이라 하면, ‘정결함’ 그리고 ‘변치 않는 약속’을 생각하게 됩니다.

맛을 내는 소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산에 오르신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고 말씀을 들으러 나온 제자들에게(마 5:1) 새로운 ‘신약적 소금’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맛을 내는 역할의 소금입니다.

조선시대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조께서 왕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 왕자들은 자기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떡이요, 엿이요, 과자요” 광해군은 좀 색다른 답을 하였습니다. “소금입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왜, 소금이지?” 그러자 광해군이 대답했습니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소금에 관한 생각을 말해 주십니다. “너희는 맛을 내는 소금이다”. 주님께서는 맛을 내는 소금으로 오셨고 사람들을 살맛 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 후, 하나님 백성이 되었고 주님을 닮은 소금이 되었습니다. 맛을 잃은 사람들을 맛이 나는 삶을 살게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는 재미가 없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맛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외된 자, 죄인, 병든 자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살아갈 재미가 없는, 맛이 없는, 평생 병들고 아프고 힘든 자들을 고쳐 주시고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박받고 힘든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 일으키시고, 살리시고, 듣게 하시고, 살맛이 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소금이 되어라”가 아니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소금 아닌 것이 노력한다고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람은 소금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이 맛을 잃을 수가 있습니까? 짠맛이 있으니 소금 아닙니까? 소금이 어떻게 하면 맛을 잃을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단 한 가지, 자기의 짠맛을 남에게 전해주면 맛을 잃게 됩니다. 보이지 않게 됩니다. 소금은 맛을 내어 주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맛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다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밟히셨습니다. 영문 밖에 버려지셨습니다. 완전한 제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다음 구절과 연결이 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3). 소금은 맛을 잃고 사라지지만 세상을 살려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풍요한 도시인 여리고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이 좋지 않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지고 도시는 죽게 되었습니다. 식물은 익기 전에 떨어지고 사람도 유산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하소연했습니다.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왕하 2:19). 그러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들고 가 물 근원에 던지니 소금이 물에 전달되고 물이 고쳐지게 되었습니다(왕하 2:20~22). 소금은 주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철저히 밟히시고 내어 주시므로 우리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커피를 좋아합니다. 미숫가루 타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다만 가루가 뭉쳐서 마실 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싫어합니다. 뭉친 것이 이 사이에 끼면 참 불편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통에 뭉쳐만 있어서는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음식과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도 뭉치지 말고 완전히 녹아 사라져야 참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삶을 내어 주고, 내 것을 내어주고, 맛을 내어 주고, 퍼 주고, 나는 밟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광됨은 다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영광입니다. 제자는 십자가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먼저 빛의 영광을 말합니다. 먼저 빛이 되라고 합니다. 빛이 된 후에 낮은 자리에 내려가 힘든 자를 도우라고 합니다. 좋은 자리를 내려놓았다고 자랑합니다. 부족한 자의 낮아짐은 겸손이 아니라 굴종이며 넘치는 자의 낮아 짐이 참된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한때 교회에 만연한 “고지론”과 “성공주의”는 우리를 얼마나 품위 없는 신앙에 처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 뵙고 나서 예전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광의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밟히는 소금의 삶을 기쁘게 자랑하였고 빛이 되었습니다.

바른 순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소금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위한 낮아짐과 내 자아의 죽음에는 빛이 나고 이 빛은 세상을 비추게 되어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