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있어야
나는 뉴질랜드 남섬 출신으로 피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돌아와서 오타고 의대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더니든에서 기독교 의료 센터를 설립하였는데 그곳은 정신적인 문제를 기독교 상담으로 치유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상담사나 의사 이상의 목회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Laidlaw 신학대를 가게 되었고, 지금은 영국 Aberdeen에서 정신건강과 실천신학 분야의 훌륭한 신학자들과 함께 박사 과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로 다루고 있는 분야는 트라우마인데,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이후 심리적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 상상외로 많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선택한 필드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 우울,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고, 당장 심장마비를 경험하고 있다고 믿을 만큼 괴로워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로 인해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내면의 고통이 신체적으로 나타났고 그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런 증상은 의료진이나 목회자들에게도 낯선 케이스 들이었고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연구를 거듭한 결과 복합 트라우마라는 결론이 났고, 어린 시절에 문제들까지 표면으로 올라오면서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부러졌으며, 동시에 마음에 금이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몸과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의사의 하루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보던 증상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었고 도와달라는 처절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것은 2013년, 2014년에 우리가 ‘헤드스페이스’라는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부터 계속되고 있는 여정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우리는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다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시작이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모든 지식이나 행동을 멈추고 그들의 절박한 호소를 들었습니다. 이제 공감과 연민에 대해 많은 글이 쓰이고 있고, 나는 앞으로도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 계속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한번 겪은 끔찍한 공황의 경험은 그걸 다시 겪을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불안이 엄습하게 되고, 이제 그런 불안은 생각에 머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몸으로 더 자주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냥 극복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처럼 쉽게 뇌와 신체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 나름대로 위로하려고 할 때, 그들이 표현하는 많은 감정이 몸에 갇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안전하다”라고 느끼는 곳, 네 그렇습니다. “우리 집” “Home sweet home”입니다. 그들은 그걸 지진으로 잃어버린 겁니다.
지진으로, 허리케인으로, 코비드로, 가정 폭력으로, “안전함”을 잃어버린 그들은 뇌와 신체의 감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역시 잃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연결되어져야 하는지 기억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그들에게 ‘신경인지’의 감각을 되찾아 줄 수 있는 건 여러분과 저, 만약 우리가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무언가를 나누고, 먹고, 이야기하고, 웃고, 이전처럼 감정을 공유할 때 느끼는 것입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