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인의 죽음
몇 해 전 일입니다. 또 아까운 목숨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자기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이분은 장래가 촉망되던 정치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더 이상 썩기 힘들만큼 썩고 썩은 정치판에서 그래도 비교적 덜 썩었고 그렇기에 사람들의 기대도 컸던 분이 자진하였기에 그의 죽음이 일으킨 파장은 의외로 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상황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든 아니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또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사회 현상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잘못된 삶의 마감 방법을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이 배우지 않을까 무척 염려됩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을 보며 문득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지금부터 거의 2,500년 전에 살았던 분의 이야기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는 신(神) 혹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 봅니다.
시인이자 의사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엠페도클레스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대접을 받았고 그러다 보니 그러한 자신의 위상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신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아무도 몰래 에트나(Etna) 화산에 몸을 던졌습니다. 신처럼 세상에 육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림으로 사람들이 자기가 신인 것을 온전히 믿도록 하기 위하여서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화산은 그가 신고 다니던 청동 신발 한 짝을 토해냈고 사람들은 그가 자진하여 화산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신으로 보이려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라는 프랑스의 철학자가 이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신화를 기초로 해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말하자면 이 콤플렉스는 ‘삶의 본능과 죽음으로의 본능이 결합’하는 콤플렉스인데 죽음으로써 신이 되기를 원했던, 아니면 최소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엠페도클레스가 바로 그러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우리 조국에서 요즈음 땅에다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하는 유명 정치가나 기업가들은 엠페도클레스처럼 신(神)으로 남고자 하는 욕망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죽음으로써 자기가 그때까지 이루어 놓은 지위나 자기가 주장해 왔던 신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신으로 추앙받았던 엠페도클레스마저도 에트나 화산이 토해낸 청동 신발 한 짝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 과연 그들의 죽음이 모든 의혹을 덮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점점 커지기만 할 따름입니다.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정말로 죽을 결심을 하였다면 죽음을 택하기보다는 죽을힘을 다하여 눈앞에 다가온 상황을 극복할 마음을 먹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면 오히려 반전의 기회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도 아닌 사회지도층의 유명 인사들이 자살이라는 극한(極限) 선택을 한 이유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자존심이나 결벽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또한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신약성경의 반 이상을 기록한 바울 사도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위대한 것은 그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가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한 뒤에 다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수많은 사람을 죄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또는 불치의 병이나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분들의 소식을 들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분들의 자살이 아닌 유명 인사들의 극단적인 선택의 소식을 들을 때에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잘못된 선택에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그런 사회적 위치에까지 올라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능력까지 가진 분들이 기껏 택한 삶의 마지막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할 때 실망감과 분노가 뒤섞여 가슴속을 휘젓습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눈앞에 다가온 괴로운 상황을 회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내가 죽는다 해도 내가 저질러 놓은 잘못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고 내 가족 내 친구들이 그 잘못 때문에 더 괴로운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자살은 결코 나의 잘못으로부터 나를 결백하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정말로 내가 잘못이 없다면 죽음 대신에 죽을 각오로 살아서 해결해야 할 것이며 내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죄의 대가를 치른 뒤에 남은 삶을 더 열심히 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 고비 고비에서 죽음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게도 나이 든 어른들에게도 죽음은 때로는 신기루처럼 안식처를 마련해 줄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옛날 에트나 화산이 토해 냈던 엠페도클레스의 청동 신발을 생각하면서 잘못된 죽음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삶은 소중한 것
삶은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내가 목숨을 버리므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아까운 사람으로 오래오래 남아있는 것과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받은 뒤 낮은 자세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대답하기 어렵다면 옛 현자의 지혜를 빌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장자(壯子)는 추수(秋水) 편에서 죽은 몸으로 삼천 년을 비단에 싸여 보관되는 거북이 보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거북이가 낫다고 말하며 초(楚) 임금의 부름을 사양합니다.
어느덧 가을도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의 길목에서 우리는 잠깐 멈춰 서서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 너무 위만 보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혹시 우리도 그 옛날 엠페도클레스처럼 신이 되고 싶은, 아니면 신처럼 대우받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잘못된 환상에서 화산으로 뛰어들지 말고 내 이웃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더불어 겸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임금의 부름이 권력과 명예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그 뒤를 따라올 세상의 무상함을 알고 있는 장자가 차라리 나는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겠다(吾將曳尾於塗中)고 말한 그 겸허한 자세를 본받는다면 곧 22대 새로운 국회가 시작되는 우리 조국의 정치판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다시는 귀한 목숨이 땅에 떨어지는 풍조가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