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선교할까?

Security,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제목이다. 한 어린 소녀가 범죄조직을 피해 늦은 밤 문이 닫힌 쇼핑몰 문을 두드리며 영화가 전개된다. 마침 주인공이 얻은 직장의 첫날 저녁이었는데 함께 근무하는 관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허접스럽게 보였지만 총칼을 지닌 갱단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는 각자의 특기를 가지고 이를 극복해 나간다.

영화 한 편을 통해 선교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선교사는 마치 적진에 침투하는 특수부대와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겁도 없이 갱단에 맞서는 저 사람들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다.

선교 훈련기관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가 선교 현장에서 유용할 때도 많지만, 때로는 쓸모없거나 아니면 별로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선교 현장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급변해 가는 상황에 있으므로 과거의 선교 이론들이 이미 낡은 유물로 폐기처분해야 할 경우도 허다하다.

이른바 선교 훈련원에서 가르치는 교과 내용이나 과목들이 선교사들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운 ‘사울의 갑옷이나 투구’가 되어 골리앗을 대적하려는 다윗과 같은 선교사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버겁기도 하고 피곤케 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선교사들을 우리 현실에 맞도록 교육, 훈련시킬 수 있는 종합적인 선교 훈련원이 시급히 요청된다.


이러한 기관은 교단, 교파, 신학적인 편협성, 인간적인 욕심의 갑옷과 투구를 벗어 던지고 세계 선교에 부응하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연합적 기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시고자 부르실 때에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종종 말한다. 정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없다’고 하는 사람인가?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그 사람이 가진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자 하심일진대, 어찌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는 몇몇 사람들처럼 주께 다 드렸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주님을 따른 제자들은 자기의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아직 남은 것이 있다. 선교는 다 드렸어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태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마태의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다. 마태는 부르심을 받을 때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마태는 재물을 주님과 바꾼 사람이다. 마태는 자기의 세관에서 쓰던 ‘도구’, 즉 ‘펜’을 ‘다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랐다.


마태는 물질도 버리고, 지위도 버리고, 모든 것을 기쁘게 주를 위해 버렸지만, ‘아직도 마태에게 남아 있는 것’을 귀하게 사용하도록 주님이 허락하셨다.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꼼꼼하게 기록하고, 조사하고, 계산하던 그 도구를 이제는 주님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사용하도록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재능이다. 모든 것을 당연히 버렸지만, 주를 위하여 사용할 귀중한 재능들과 그 무엇이 아직도 우리 손에 있다.

모세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출 4:2)

모세의 손에는 언제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그리고 항상 모세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여정 가운데서 이룬 여러 역사를 찾아보라. 하나님은 놀랍게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셨다.


다비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행 9:39)

베드로가 기도함으로써 다시 살아난 다비다의 손에는 ‘바늘’이 들려 있을 뿐이다. 다비다처럼 ‘바늘’ 밖에 손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주를 위한 좋은 도구가 아직 있음을 알아야 한다.

루포의 어머니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롬 16:13)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하여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루포의 어머니는 ‘사랑의 마음’으로 바울을 대했을 것이다. 마음을 아름답게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달란트이다.

선교는 다 드렸어도,‘무엇을 얻으리이까’의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베드로가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사건을 보고, 주님께 걱정스럽게 물은 적이 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인간적인 모습으로는 당연한 것이요, 신앙적인 면으로는 너무 타산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베드로의 질문은 언제나 시기상조이다. ‘아직도 주를 위해 버릴 것이 우리에게는 항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얻으리이까?’는 천국에 가서도 감히 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예비하셨든지 그것은 우리에게는 적어도 넘치는 축복이 될 것이 틀림없다.

선교를 위해 ‘아직 남아 있는 조그마한 것’을 사용할 준비를 하라.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을 아직도 우리 손에 남겨 주셨다. ‘다 버렸다’고 말할 때조차도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주님도 그리고 우리도 안다. 그러므로 마음껏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시고자 부르실 때 필요한 능력도 함께 주신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 자질, 달란트를 무시하면서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꼭 어울리는 내게 있는 것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때론 다윗인 나에게 사울의 갑옷과 투구, 칼 등의 것이 맞지 않는 것처럼 남의 것이 좋아 보여도 내게 주어진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에게는 혹 아주 작은 도구처럼 보이는 것도 유용하게 쓰신다.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라.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할 때 우리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가?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인가?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모든 율법의 지식과 열심은 어떻게 되었나, 모두 없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울에게 남겨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사용하셨고, 그 결과 오늘날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