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집, 가족을 공부하다

_출처: 아름다운동행(http://www.iwithjesus.com),김겸섭

천적(天敵)으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새들은 둥지에 알을 낳는다. 부화된 어린 새들은 성조(成鳥)가 되기까지 둥지 안에 어미 새의 양육을 받는다. 어린 새가 자라는 둥지를 ‘보금자리’라고 한다. 사람의 보금자리는 ‘가정’이다. 사람은 가정의 부모로부터 ‘사람됨의 조건’인 예의와 배려와 의무와 책임과 같은 도덕성을 학습 받고 더 나아가 수준 높은 삶을 위해 필요한 지성과 영성을 체득한다.


문학사에 빛나는 브론테 자매들의 작품들, 곧 샤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앤 브론테의 <애그니스 그레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경건한 영성을 갖춘 아버지 패트릭과 시와 그림을 사랑했던 어머니 마리아가 마련한 ‘착한 보금자리’가 잉태한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어미 새가 철저히 보금자리를 지켜도 천적의 공격이 발생하는 것처럼 가정도 때로 ‘세속의 거센 문화’로부터 위태로울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의 작품
가정은 인간이 고안한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다.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돕는 배필”(창세기 2장 18절)로 하와를 선물로 주셨다. ‘돕는 배필’의 히브리어 ‘에제르 게네그도’는 ‘서로 마주보며 돕다, 서로 반대하며 돕다’라는 의미로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인격적 동등함’을 반영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창세기 2장 24절)을 이루는 결혼의 창시자이시며,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1장 28절)라는 ‘문화명령’을 실현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혼은 음행 이외에 다른 이유로는 나눌 수 없다’(마태복음 5장 32절)고 선언하심으로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현실 속의 가정은 경제적(재산), 도덕적(성적 외도)인 이유로 갈등하는 부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마찰을 빚는 부모와 자녀로 인해 혼란스럽다. 이 시대의 가정은 더 이상 ‘장미꽃이 피는 화원’이 아니다.

가정이 아프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의 청년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아버지의 빚에 시달리는 가정을 위해 새벽부터 출근하는 바른 청년이다. 특히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하는 여동생에게 헌신적이다. 어느 날 아침에 잠을 깬 청년은 자신의 몸이 갑각류 벌레로 변신되어 있음을 알고 경악한다.

가정의 자랑이었던 아들이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자 아버지는 썩은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히고, 여동생은 “이것을 치워버려야 우리가 살아요, 자신이 동물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진즉에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라고 소리친다. 청년은 방 안에 감금된지 3개월 만에 쓸쓸히 죽고 가족들은 여행을 떠난다.

작가 카프카는 가정을 위해 희생하던 청년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진짜로 ‘벌레 취급’ 받은 현실을 통해 이 시대의 보금자리인 가정이 얼마나 쉽게 해체될 수 있는 공동체인지를 고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당대의 의인이며 완전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던 노아는 세 아들을 둔 가장이다. 대홍수 이후 첫 농사의 수확물로 만든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채 잠든 모습을 목격한 아들 ‘함’이 셈과 야벳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이후 잠을 깬 노아가 분노하여 ‘함’을 저주한다(창세기 9장 18~25절). 함의 실수와 노아의 분노가 ‘잘못된 결합’을 이루는 순간 ‘좋았던 가정’이 아버지가 자식을 저주하는 ‘지옥’으로 변신한다.

아픈 가정(HOME) 치유에 필요한 H.O.M.E 처방 가정이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인 까닭에 붕괴가 불가능한 ‘견고한 성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작은 오해와 갈등만으로도 깨질 수 있는 ‘식탁 모서리에 놓인 유리 꽃병’일지 모른다. 오늘날 유리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렇다. 이 시대의 가정은 지금 많이 아프다.

가정도 간호가 필요하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소리는 ‘무너지는 소리’이다. 산사태와 건물의 무너지는 소리는 재앙이다. 그러나 산과 건물의 붕괴보다 더 무서운 소리가 있다. 그것은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이다. 가정은 ‘소리 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작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속의 안나는 청년 장교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불행한 결혼’을 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준수한 브론스키의 매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남편 카레닌의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크다고 느끼며 구토를 한다. 이후 안나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 세료쟈에 대한 의무에 싫증을 느낀다. 이후 안나와 카레닌의 가정은 ‘소리 없이’ 없이 무너진다.


갈등과 다툼, 그리고 독선과 무관심으로 아픈 가정에게 지금 응급조치와 간호가 필요하다. 아픈 ‘가정(HOME)’의 치유에 필요한 ‘H.O.M.E’이라는 ‘네 가지 처방’을 내려 본다.

H(hand) – 서로의 손을 잡아줘라
손을 잡는 행위는 위로와 화해의 표현이다. 실패와 좌절로 무너진 남편의 연약해진 손을 잡아주는 아내의 손은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힘을 발한다. 사람의 관계에 지친 아내의 가냘픈 손을 잡아주는 남편의 손은 겨울바람을 넉넉히 이기는 목도리보다 훨씬 온기가 있다. 학업의 무게에 눌린 자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는 부모의 손은 어떤 참고서보다 유익하다. 남편과 사별한 시어머니 나오미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었던 며느리 룻은 이후 훌륭한 품성의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메시아 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룻기 1장 16절, 4장 13절). 서로가 손을 따스하게 잡는 순간 절망은 해체되고 소망이 새로 움튼다.

O(obey) – 서로 기쁘게 순종하라
순종은 자존심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할 때 순종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세우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복하는 행위이며, 또한 부모의 권위를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태도이다. 부모 또한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바울의 선교를 후원하기 위해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함께 동행 했던 아굴라와 아내 브리스길라의 삶은 이 부부가 서로의 의견에 순종하는 태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사도행전 18장 18절). 가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군림하는 태도를 취할 때 흔들린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배려하는 태도로 순종할 때 대부분의 갈등은 소멸된다.

M(mercy) – 서로에게 너그러워져라
가정은 ‘법정’이 아니다. 따라서 부부 간에 서로의 허물을 강하게 질책하고, 자녀의 실수를 지나치게 문책하는 법관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서로의 잘못을 모르는 체 용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훈계와 견책은 격앙된 감정의 발산에서 이뤄지는 책망이 아니라 훈육의 차원에서 차분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훈육도 너그러운 어투와 말투로 진행이 되어야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남지 않는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온유와 너그러움으로 맞이해 준 아버지는 햇빛만큼 ‘눈부신 아름다움’이다(누가복음 15장 20절).


E(ear) – 서로의 말을 경청하라
시인 나희덕은 “벽의 반대말이 해변이다”라고 읊었다. 벽은 ‘단절의 공간’이다. 해변은 밀물과 썰물이 자유롭게 오가는 ‘열린 공간’이다. 가정이 ‘벽’이 아닌 ‘해변’이 되려면 서로가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열린 귀’가 필요하다.

유대 랍비 힐렐은 “현명한 사람은 혀보다 귀가 길다”라는 가르침을 통해 경청이 ‘현명의 시작’임을 알려준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말’은 잘하는데 ‘대화’는 서툴다. 자신의 말만 하기에 분주하여 타인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지 못해서이다. 가정의 불화도 ‘대화의 단절’에서 파생된다.

서로의 말에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태도는 오해와 불만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묘약이다. 하루의 마감인 저녁에 부모와 자녀가 한 식탁에 앉아 하루에 발생한 작은 일들을 소곤소곤 나눌 때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간극은 한층 좁혀진다.

그냥 좋아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깨끗한 정원’은 없다. 정원사가 잡초를 뽑고 해충을 걸러내는 수고 끝에 ‘고운 화원’이 탄생한다. 가정도 그냥 좋아지지 않는다. 부부간의 존경과 배려, 자녀와의 깊은 이해와 공감을 통해 조금씩 아름다워진다. 이제 5월이다. 우리의 가정의 향과 운치가 가로수 곁의 목련과 영산홍의 아름다움을 가볍게 능가하는 ‘멋짐’이 되기를 꿈꾸며 잠시 문안인사를 드린다.

“그대 가정, 안녕하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