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난 뒤에
2024년 4월 10일. 제2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가 막을 내렸다.
4년마다 한 번씩 홍역처럼 치러지는 선거지만 2024년의 선거는 본격적 유세가 시작도 되기 전에 공천 자리를 놓고 벌이는 여야 당내의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부터가 너무도 한심하다 못해 처량했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는 분 중 훌륭한 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공천 자리를 얻기 위해 당대표에게 달라붙어 온갖 충성과 아첨을 다 해 공천을 따냈다.
우여곡절 끝에 공천을 따내 후보자가 되면 이번에는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간이라도 빼 줄 듯 사탕발림을 하며 결코 지킬 수 없는 공약(空約)을 함부로 남발하였다. 여당 후보든 야당 후보든 그들의 유세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자기가 지역 주민과 나라를 위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가를 역설했고 한편으로는 상대방 후보를 헐뜯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저런 사람들이 국회의원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의 정치철학이라도 갖고 정치를 하겠다고 국민 앞에 나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여하튼 선거는 끝났고 그 결과는 의외일 만큼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국민은 역시 위대했다며 현명한 국민의 선택을 치켜 올리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야당 사람들의 모습이 하루 종일 티브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패배한 여당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티브이에 나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당선 소감을 발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나는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노르웨이 시인 올라브 하우게(Olav H. Hauge)의 아주 짧은 시(詩) ‘그들이 법을 만든다’가 생각났다.
‘그들이 법을 만든다’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다.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 (전문)
올라브 하우게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독학으로 공부하고 평생 정원사로 노동하며 전원시를 남긴 시인이다. 그의 많은 시는 숲속에서 쓰였다고 하는데 자연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노래하던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정치 냄새가 나는 신랄한 시를 썼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정치하는 사람들의 자질이나 행태는 노르웨이나 우리 한국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기에 자연 속에 은거하던 시인의 순수한 눈에도 미덥지 않게 보였기에 그런 시를 쓰지 않았나 싶다.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언어나 행동거지에 철학이 담겨있지 않았다는 뜻이겠지만 왜 많은 철학자 중에 유독 플라톤을 거명했나를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가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을 만큼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가 플라톤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하우게는 분명 이 시를 쓰면서 플라톤의 철인(哲人)정치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시민 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愚民)정치라고 비판했다. 대중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사익만 추구하기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반면에 지식을 사랑하고 탐구하는 철인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기에 이들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플라톤이 천명한 철인정치의 시작점은 ‘이데아’일 것이다. 현실 세계에 완전한 이데아를 이룩할 수는 없겠지만 이를 추구하므로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그는 생각했다. 철학자라고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손에 잡히는 사물에 사로잡혀 있는 일반 대중보다는 훨씬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희망한 것이다.
기원전에 태어난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너무도 격차가 크기에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시인 하우게도 탄식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정치 현실을 보면 다시 한번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해야 했는지 수긍이 가는 점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우게는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다고 한탄하였지만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도록 만든 것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플라톤 시대의 대중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배울 기회도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로 하여금 국가의 일에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지도자를 뽑도록 하는 것은 우민(愚民)정치라고 비난을 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중은 어떤가? 우리 대한민국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 국민의 대학 진학률은 이미 전체 인구의 70%에 육박했다. 국민 대다수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다. 거기다 한국인의 IQ 평균은 세계 1위이다. 이렇게 똑똑하고 많이 배운 국민들이 참여하는 정치는 결코 우민정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뽑은 국회의원이나 정치 지도자가 흔히 도덕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결함이 발견돼 비난을 받는다. 왜일까?
답을 찾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가? 조금만 객관적인 마음 자세로 우리를 성찰하면 우리가 비난하는 정치가나 그들을 뽑은 우리나 다 같이 지극히 탐욕스러운 이기심에 갇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불과 한 세대 전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해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나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살게 된 이후 언젠가부터 우리 모두는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버리고 나 혼자만 잘 살면 되는 이기심의 늪에 빠져들어 갔다. 더 이상 정의는 없었다. 내게 득이 되면 옳은 것이고 조금이라도 손(損)이 되면 옳지 않은 것이었다. 이웃은 경쟁자였고 성공을 위해 내가 딛고 넘어야 할 장애물일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울 좋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를 뽑으니 제대로 된 사람을 뽑기가 힘들다. 말이야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뽑는 사람이나 뽑힐 사람이나 모두가 내심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이기심으로 선거를 치르니 결과가 좋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어느 나라든 부정부패의 대부분이 정치로부터 나온다. 이런 작태를 미리 내다보는 눈이 있었기에 플라톤은 그 옛날에 미리 철인정치를 주장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사회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철인정치를 맡을 사람으로 철학자 겸 통치자인 철학왕(哲學王)을 상정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철학왕과 같은 이상적인 인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철학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세상의 정치판이 이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왜 인간은 정의롭게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정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정치가나 그 정치가를 뽑는 대중들이 이러한 플라톤의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선거가 보다 바르게 치러져 제대로 뽑힌 정치가들이 보다 바른 정치를 할 것이고 하우게와 같은 시인이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다.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라는 시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4.10 총선은 끝났다. 그리고 당선된 사람들은 곧 국회에 들어가 22대 국회를 만들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했다. IQ 평균과 대학 진학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국민이 선택한 사람들이니 그 수준에 맞는 국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 노파심에서 부탁하기는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플라톤의 바람대로 철학왕과 같은 국회의원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철학 하는 마음을 가진 국회의원이 돼주었으면 한다. 국가의 일을 결정하거나 입법할 때 개인이나 내 편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가 목적이 되는 방향으로 나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리하여 4년이 지난 뒤 임기가 끝날 때 4.10 총선으로 태어난 22대 국회는 결코 우민(愚民)정치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평을 듣게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