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선교사들

뉴질랜드에는 복음이 언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20여 년 전, 내가 뉴질랜드에 도착하면서부터 가졌던 질문이다. 사무엘 마스덴(Samuel Marsden) 선교사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곳곳에서 그의 작은 흔적을 만나볼 수 있었다. 책 속에서는 물론이고 오클랜드 북쪽의 여러 곳을 다닐 때마다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다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와이푸(Waipu)의 작은 박물관에서, 베이 오브 아일랜드의 와이탕이 박물관(Museum of Waitangi), 케리케리 미션스테이션(Kerikeri Mission Station)를 방문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작년 2023년은 두 곳의 의미 있는 곳을 방문했다. 작년 2월에 GMS 이사장, 선교 사무 총장 일행과 함께 더 위쪽에 있는 랑이호우아(Rangihoua Heritage Park )에 있는 사무엘 마스덴, 그가 200여 전에 뉴질랜드 땅에서 첫 설교를 했다는 현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작년 11월에는 호주 시드니의 파라마타에 있는 사무엘 마스덴이 지었다는 예배당과 그의 묻혀 있는 묘지도 찾아보았다.

잘못된 역사를 보며
얼마 전에 넷플릭스(Netflix)에서 아주 황당한 영상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다는 십자가 나무 조각과 그때 쓰였다는 못을 숭배하는 로마가톨릭 신앙의 허상 때문이었다. 이는 중세 십자군 전쟁 때에 군대를 후원하는 유럽 봉건 영주와 교회들의 잘못된 믿음 때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십자군들은 매번 귀국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 나무 조각들’과 ‘못’들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모아진 나무 조각들과 못들은 아마 노아의 방주를 다시 짓고도 남을 양이 쌓였다고 한다. 이 나무조각들은 세계 곳곳의 큰 성당으로 흩어져 ‘성물’이라 전시하고, 순례자들은 여기에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는 등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우상이 되었다.

셈의 족보에 숨겨진 비밀
노아 시대 대홍수 이후, 셈과 함, 야벳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중 셈의 족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숨겨진 선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1장 10절 이하에 나오는 셈의 족보를 간추려 보면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았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고 에벨은 벨렉을 낳았고 벨렉은 르우를 낳았고 르우는 스룩을 낳았고 스룩은 나홀을 낳았고 나홀은 데라를 낳았고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이 족보에는 의도성이 짙게 담겨있다. 셈의 족보는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으로 이어지는 10대까지의 신앙계보이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그리고 아르박삿에서 아브람까지 반드시 10대로 묶는 것은 완전함을 상징하기 위해서도 그럴 수 있다. 이 족보는 족장들의 신앙 성장이나 또는 확립을 나타낸다.

아르박삿의 계통의 아들들의 이름 속에는 매우 큰 의미가 숨겨져 있다. 셀라는 ‘보냄, 선교한 사람‘이라는 뜻이요, 에벨은 ‘어디를 넘어서, 순례자, 이민자, 히브리 사람’이고, 벨렉 ‘분열, 나뉨’이라는 뜻이며, 르우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이요, 스룩은 ‘무성한 가지’, 데라는 ‘체류자, 이방 세계를 떠나는 자‘라는 뜻이다.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히브리 사람이라는 호칭을 들었는데 그 뜻은 ‘강을 건너온 사람’ 즉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이사야 41장 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즉 야곱을 향하여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부르신다. 아브라함의 조상 때에 벌써 ‘하나님의 벗, 친구’라는 뜻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숨겨진 선교사 셀라
나는 요즘 성경을 인물로 살펴보고 있다. 사람의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셀라, ‘보냄, 선교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며 매우 놀라움은 물론이고, 그 이름의 뜻만으로 그의 사역을 엿볼 수 있다. 이름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셀라가 분명하게 선교적 사역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한 민족적 선택의 기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선교하듯 복음 전하고, 건너가서 터를 잡으며, 불신앙 계통과 분리하며, 하나님의 친구로서 깊이 교통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일구어내고 이 신앙과 축복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며, 결국 신앙의 고향을 향하여 떠나는 모습이 매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보면서 누가 선교사이며, 누구부터 선교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중요하다. 사도행전에서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보낸다는, 겉으로 드러난 선교사도 있지만 구약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선교사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많다.

누가 선교사인가?
이민목회를 하는 목사들 가운데 누구는 선교사고 누구는 단지 목회자라고 구분하는 경향도 있다. 또 공식적으로 선교기관의 파송을 받은 사역자만 선교사라 하기도 한다. 20여 년 전, 내가 뉴질랜드로 이민 목회를 떠난다고 하니, 오클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온 교회 청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뉴질랜드에 가시면 특별히 뭘 하려 하지 마시고, 그냥 신앙생활 바르게 하는 것 자체로도 오클랜드에서는 선교인 것 같아요.”

그 한마디는 이것저것 목회의 욕심이 매우 컸던 나에게 처음에는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늘 감사하게 마음에 잘 새기도 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 모두가 선교사라 할 수 있다.

가정에도 학교와 직장에도 숨겨진 선교사들이 많다. 특히 점점 신앙을 잃어버리는 자녀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가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먼저 바른 신앙 생활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크게 이름이 알려진 선교사보다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선교사가 더 많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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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