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책과 요정

첼트넘(Cheltenham) 해변에서의 수영
몇 해 전이었던가, 그해 여름엔 뉴질랜드 여름답지 않게 찌는 듯한 무더위가 며칠이나 계속된 적이 있었다. 그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아내의 손을 잡고 바다로 향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첼트넘 해변으로 갔다.

거긴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고 앞에는 랑기토토(Rangitoto) 섬이 오른쪽에는 노스헤드(Northhead) 동산이 있기에 고즈넉하기도 하고 백사장이 고와서 수영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바다를 보기는 좋아해도 물에 들어가기는 싫어하는 아내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책을 보기로 했고 나만 혼자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부탁하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면서 나는 천천히 앞에 보이는 랑기토토섬을 향해 발을 옮겼다.

평소에 이곳을 산책하다 보면 첼트넘 해변과 랑기토토섬 사이로는 크루즈를 비롯한 커다란 배들이 자주 지나갔었다. 그렇기에 나는 바닷속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물이 곧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시원한 물이 발목을 적시고 차츰 종아리를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바닷속 모랫바닥은 의외로 완만해서 100미터 이상을 걸어 들어가도 물은 허리밖에 차지 않았다. 다시 100미터쯤을 더 걸어 들어가자 비로소 어깨쯤에 물이 찼고 뒤를 돌아보자 나무 밑에 앉아있는 아내가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몸을 감싸오는 물은 시원했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햇볕은 따뜻하기만 했다.

문명의 흔적을 걷어내다
물결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수영을 하다 보니 몸이 물결 위로 떠오를 때엔 해변의 사람들이 보였다가 물결이 가라앉을 때엔 해변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몸을 돌려 깊은 바다 쪽을 향하자 주변에 아무도 안 보였다.

나는 문득 몸에 걸치고 있는 수영복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 내 몸에 마지막 남은 문명의 흔적마저 걷어내자’라고 나는 중얼거리며 수영복을 벗어버렸다.

아, 얼마나 홀가분한가! 그리고 내 알몸을 얼싸안으며 스쳐 지나가는 바닷물의 매끈한 촉감이라니! 바다는 가장 관능적인 넓은 가슴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매끈한 살 속에서 나는 문득 온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을 느꼈다.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이처럼.

나는 물 위에서 벌렁 뒤로 누웠다. 조용히 다리만 움직였다. 햇살이 부서지듯 알몸의 내 위로 부서져 내렸고 잔잔한 물결이 요람처럼 나를 흔들어주었다. 오른손엔 수영복을 움켜잡고 있었다. 다시 문명으로 나갈 때에 필요한 입장권이기에 꼭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내리 쪼이는 햇볕, 때로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미풍 속에서 나는 차츰 현기증 같은 졸음을 느꼈다. 그때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프랑스 시인))의 시구(詩句)가 떠올랐다. 아마도 투명한 햇볕 속에서, 밑에서 흔들리는 부드러운 물결에서, 아니면 내 알몸을 핥으며 지나가는 미풍 속에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어떤 요정(妖精)들의 존재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 요정들이 영원하기를 나는 바란다
너무 투명하여
그녀들의 가녀린 장밋빛 살결이, 숲속의 수면(睡眠)으로
졸리운 대기 속을 떠돈다
나는 꿈을 사랑했던가? (말라르메의 반수신의 오후 중에서)

다시 문명 속으로
그 오후 얼마나 물 위에 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모터보트가 굉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바다를 나왔다. 수영복을 걸치고 다시 문명 속으로.
그 저녁 집에 돌아와 시 한 편을 썼다.

바다

문득 책을 버리고 뛰어든
어느 뜨거운 여름날의 바다
얼마나 시원한가
내 알몸을 감싸주는 물의 촉감

넘실거리는 파도를 베개 삼아
바다 위에 눕는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부서져 내리는 빛에
나를 맡긴다
얼마나 따뜻한가
내 알몸을 감싸주는 빛의 촉감

그때
내 머릿속의 모든 책들은
물결 따라 흘러 나가고
빛살 따라 올라가 버리고
아아 나는 촉감의 세계로 빠져든다
물결 따라 빛살 따라
구석구석 내 몸의 실핏줄이 열리고
태초의 촉감이 밀려 들어온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가
책 속에서의 끝없는 방황
시간이 지나면
잘라져 나가야 했던 손톱 발톱처럼
내 머릿속을 빠져나간
지식의 파편들
지금 내 알몸을 감싸고 있는 촉감 속에
형체도 없이 녹아버린 것들

아아
물이여 빛이여 내 알몸의 실핏줄이여
이제 나를 안내하라
책을 버리고 뛰어든 이 여름의 바다 위에서
나는 비로소 촉감을 만나고
촉감 속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느낀다

삶은 책이 아니었다
삶은 내 밑에서 넘실거리는 바다였고
삶은 내 위에서 내리 쪼이는 햇볕이었고
삶은 그것들을 느끼는 알몸의 내 실핏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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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