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시작한 뉴질랜드 이민

‘유학’이라 함은 한자로 ‘留學’, 즉 ‘외국에 가서 공부한다’는 의미로 교포 자녀나 유학생이 외국 생활을 하며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을 포괄적 의미의 유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 자녀가 한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일종의 유학이다.

2023년 12월 영화가에서는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12일’까지 50일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대통령 시해 사건과 군사 쿠데타를 소재로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필자 또한 그 시절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아직도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이 있지만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군사기밀로 미처 알지 못했던 일부 내용들을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고 다시 한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이 끝나고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필자는 ‘베이비부머 세대’이자 ‘샌드위치 세대’이다. 1991년 결혼을 하고 큰 딸을 출산하며 서른 나이를 앞둔 필자는 대한민국 사회의 격변기와 시대적 상황에 좀 더 민주주의가 잘 정착되고 발전된 나라로 유학을 가보고 싶었다.

이러한 연고로 유학병에 걸려 캐나다와 뉴질랜드 유학 정보를 알아보던 중 91년 연말부터 뉴질랜드는 점수제 이민제도를 시행하여 기술이민을 받아들였고 이공계대학을 졸업한 30세는 점수가 충족되어 신청만 하면 간단한 인터뷰를 거쳐 영주권을 승인하여 주던 시절이었다.

물론 제도를 시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자가 많아지고 영주권 승인 점수가 높아져서 어려워지긴 하였으나 대부분 초창기 일반이민 1세대는 이때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이다.

영주권 승인을 받고 뉴질랜드 입국하면 참정권을 포함한 영주권자의 모든 혜택을 도착하는 날부터 보장받게 되는데, 본인은 물론 가족과 자녀의 국공립학교 학비는 당연히 무료이고 여러 가지 복지혜택이 엄청난 뉴질랜드는 소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느껴졌다.

학비 부담없이 공부도 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녀도 양육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적어도 나와 내 가정에 있어서 뉴질랜드는 일종의 ‘유토피아’라는 심정으로 영주권 승인과 출국을 위하여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한 덕분에 영주권 신청과 승인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한국 생활 30년을 정리하고 직항도 없던 1993년 봄 아내와 돌 갓 지난 딸을 데리고 부모님과 교회 교역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공항도 없던 시절 ‘김포-타이베이-싱가포르-오클랜드’라는 전무후무한 항공 여정으로 20여 시간이 넘게 걸려 오클랜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영주권 신청을 같이한 대학 후배가 뉴질랜드에 한 달 먼저 도착하여 있었는데 그 친구가 다니고 있는 교민 교회에서 공항 픽업부터 그야말로 Full Package 정착 서비스를 해주었기 때문에 원래 다니려고 계획했던 교회에는 못 가고 열심히 도와준 정착 서비스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그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교회 생활을 꾸준히 하였고 성가대 봉사 등 열심히 섬기다 왔지만 전형적인 직장생활을 하였기에 Sunday Christian이면서 특별 새벽기도나 부흥회 정도 출석을 하였었다면 모든 것이 제로 상태로 시작하는 뉴질랜드 유학 이민 생활의 하루 일과는 교회로 시작하여 교회로 마무리되는 일정이 한동안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분위기는 이민 오면 뉴질랜드 정부에서 의료, 교육을 포함한 사회보장 혜택이 다 제공되니까 기본 일 년은 ‘골낚(골프와 낚시)’하며 관망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대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다닌 교회는 워낙 극성(?)이라 주일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새벽기도와 수요예배 및 금요 철야예배는 물론 매일 저녁 7시에 기도회를 하는데 우리도 젊은 나이에 특별히 할 일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이라 열심히 예배와 기도회에 참석하며 중보기도 제목과 개인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이 기도회 시간에 많은 초신자들과 우리도 한국교회 생활에서 경험하기 힘들었던 성령 체험과 방언의 은사 등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신앙생활의 깊이가 더해졌다.

그 당시 이민 오는 자들은 공항에서 누굴 만나서 정착하느냐에 따라 이민 삶이 정해진다고 했을 정도로 각 교회와 종교 단체마다 정착 서비스 팀을 구성하고 전도와 교회 부흥을 위하여 힘써 왔던 시절이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제법 교인들도 많았으며 거의 매달 미국, 한국, 호주 그리고 일본 등지로부터 이민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한 달이 멀다 하고 방문하여 집회와 기도회, 그리고 여러 가지 비전을 주었는데 그때마다 필자도 선교의 비전도 품어보고 또 이민 유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목회자로부터 많은 이민 목회의 경험과 설교를 들으면서 지금껏 생각나는 것은 자녀들에게 한글을 꼭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잘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몸소 보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쉬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Mission Impossible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TGIF(트위터, 구글, 인스타, 페이스북) 세대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인터넷 기반도 없거나 제한적이고 Globalization이라는 단어도 생소하던 시절에는 영어 100% 환경인 뉴질랜드에서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노력하지 않는 한 쉽지 않았다.

주말에 운영하는 한국학교와 교회 주일학교에서 그나마 체계적인 한글을 배울 수 있었고 TV유치원 뽀뽀뽀 비디오테이프 정도가 다였던 시절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에서 취학아동으로 출발한 교포 자녀들 중 성인이 되었음에도 한국어가 쉽지 않은 케이스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이민 오면 핵가족으로 살다 보니 친인척이나 조부모님과 같이 지낼 시간이 없어서 부모 공경의 예를 보여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꼭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고,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과 교회를 잘 섬기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잘 기억하고 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늘 기도하고 교회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 결과 출가한 딸들이 지금까지도 기도 제목을 공유하고 부모에게 기도 부탁하는 모습을 보며 이민 초창기 때 만나 뵈었던 목사님들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딸이 한 명 더 늘어 네 식구가 열심히 기도하며 서로의 맡은 바 일과 공부를 감당하며 살아온 지 이민 30년이 되는 2023년,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볼 때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들도 많았지만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두 자녀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 고등학교까지는 뉴질랜드에서 공부하다가 한국의 의과대학으로 다시 유학 가서 큰딸은 소아과 전문의로, 둘째는 가정의학과 수련의로 둘 다 의사가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들을 만나 결혼했고 교회도 열심히 출석하며 한 명은 이제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초저출산 시대에 감사하게도 우리 부부가 곧 할무이 할부이가 된다.

한편으로는 IMF는 끝났지만 많이 힘들었던 2000년 초, 목사님의 권유와 기도로 시작한 유학원을 20여 년 이상 운영하며 많은 학생들의 유학 생활을 지도하고 대학입시를 통하여 열매를 맺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기도의 응답, 그리고 신앙의 도전을 같이 공유하며 은혜를 나누는 거룩한 부담으로 크리스천 라이프 연재를 통하여 글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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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길
연세대학교 졸업, 뉴질랜드 광림교회, 우리엔젯유학원 대표원장 / 대학진학 컨설턴트 / 교육칼럼니스트. 20여 년간 유학원을 운영하며 두 자녀를 모두 의과대학에 보내어 의사로 성장시키며 신앙과 교육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에피소드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