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처럼 단 지혜
잠언 24:13~16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Eat honey, my son, for it is good; honey from the comb is sweet to your taste. Know also that wisdom is sweet to your soul; if you find it, there is a future hope for you, and your hope will not be cut off.”
필자에게 하나의 습관이 있다.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일어난 후 챙겨갈 물을 데우면서 꿀 한 스푼을 먹는 것이다. 공복에 꿀을 섭취하면 뇌 활동을 활성화하고 신체를 잠에서 깨우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신진대사를 촉진하여 몸속에 쌓인 독소와 노폐물 배출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 꿀을 먹으면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뜩 떠지고 정신이 바짝 든다.
이와 같은 꿀의 효능은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면서 꿀을 찍어 먹은 일이 있었다. 기자는 꿀을 먹은 후 그는 자기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꿀이 우리의 눈을 밝게하고 피로를 가시게 하듯 지혜도 우리의 영의 눈을 밝게하고 지친 마음을 새롭게 한다고 말한다. 눈이 밝아지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본질과 실체를 보게 된다.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그 문제의 핵심을 보고 원인을 파악하며, 해결할 길도 보게 된다. 무엇보다 지혜의 근본이며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잠언 기자는 그런 연유에서 지혜를 얻은 자에게 장래가 보장되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과도한 요구와 정보에 시달리고 짓눌리고 있다. 그 결과 무분별한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마치 너무 피곤하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잠들어 버리거나 그 피로를 풀기 위해 과음이나 과식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무절제, 무분별, 충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지혜다. 우리에게 본질과 핵심을 볼 수 있는 안목, 참과 거짓, 공과 사, 의와 불의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 전능자를 의지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는 지혜 말이다.
중세의 유대인 사회에서는 어린이가 읽기를 배우기 시작할 때 공개적으로 축복해 주는 의식이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에 의해 선생에게로 넘겨진다. 선생은 소년을 무릎에 앉히고 히브리어 철자가 적힌 돌 판을 보여준다. 그 돌판에는 토라, 곧 “모세 5경이 너의 것이 될지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선생이 글자 한 자 한 자를 큰 소리로 읽으면 그 어린이도 따라 읽는다. 그리고 나면 석판 위에 꿀을 발라 어린이가 혀로 꿀을 핥아 먹게 만든다.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의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을 기억하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주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으로 오늘 하루를 힘차게 승리하며 살기를 기원한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시편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Lift up your heads, O you gates; be lifted up, you ancient doors, that the King of glory may come in.”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인상 깊게 들었던 강의가 기억난다. 세계적인 석학까진 아니지만, 구약학계에서는 나름 저명한 교수가 있었다. 인자한 성품과 백발에 신뢰감이 가는 목소리, 그리고 성경에 대한 박식함을 지닌 교수님은 많은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에게 존경받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교수님께 배운 대부분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시편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문의 머리가 무엇이며, 왜 시편기자는 머리에게 들리라고 명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문의 머리는 말 그대로 문의 가장 윗부분을 뜻하고 그 문머리가 들려야 할 이유는, 문보다 크신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러나 내 기억력을 극대화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이의 모습이었다.
나이가 70이 넘으신 노교수가 이 시편을 해석하면서 보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해맑고 설렘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마치 어린 아이가 선물로 받은 큰 선물을 친구에게 자랑하듯 설명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그는 영광의 왕,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직접 보면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그렇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피조물보다 크신 분이다. 감히 그의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 그 하나님의 크심을 볼 때 우리의 심령은 감사와 설렘으로 충만할 것이다. 경외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결코 자거나 졸지 못할 것이다. 정신이 바짝 들어 그분 앞에 준비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국가 원수가 당신의 집을 방문한다고 생각해 보라. 대충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크신 하나님을 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낮아지는 것이다. 내 시선의 위치가 교만으로 인해 한없이 높아져 있으면 하나님의 크심이 잘 안 보인다.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 집중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볼 수 없다. 그러니 다시 오실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과 거룩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자. 평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찬양과 선포로 예비하자.
보호하시고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그 변함없는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고 사랑과 순종으로 반응하길 원한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 주와 함께, 주 안에서 거할 때 모든 부족함은 사라지고 참된 만족으로 충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