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良才川)에서 칸트를 만나다

양재천의 산책로
11월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후에 아내와 같이 양재천(관악산에서 시작되어 서울의 서초구와 강남구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의 산책로를 걸었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된 미세먼지가 보통보다 나쁘다는 경고가 있었던 날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산책로를 오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의 위협보다는 눈을 꽉 채우고 들어오는 늦가을 아름다운 양재천의 유혹이 훨씬 강했나 보다.

지하철 학여울역에서 시작되는 맨 위편 산책로 양쪽엔 감나무들이 많았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감이 매달려 있는 감나무들은 가을 풍경에 정점을 찍어주는 아름다움이다. 배고프던 옛날 같으면 잎사귀도 거의 다 떨어져 버린 가지에 동그마니 매달려 있는 감이 남아있을 새가 없었겠지만 풍요의 시대에 가장 풍요로운 지역에선 새들도 배가 고프지 않은 지 감은 가지마다 주홍빛 장신구인 양 가을 햇볕 속에 빛났다.

은행나무들은 지난밤 분 바람에 많은 잎사귀를 떨구고 속옷 차림의 여인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도열하고 있었고 떨어진 은행잎들은 수도 없이 많은 노랑의 모자이크인 양 서로 겹치고 얽혀서 산책로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은행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단풍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서로 시합이라도 하듯 저마다의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도 그 화려한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걷다가 위편 산책로에서 아래로 내려와 냇가 바로 옆에 조성된 보행로를 걸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 반짝이며 흐르는 냇물을 보다 가까이 쳐다보며 걷고 싶어서였다.

오리들이 짝을 지어 여유롭게 물 위를 떠다녔고 그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는 흰 두루미 한 마리가 나는 너희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듯 긴 목을 우아하게 세우고 조용히 서 있었다. 냇가의 양옆에는 함께 모여서 장관을 이루는 갈대와 억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흰 머리를 뒤로 돌려 우리를 맞아주었다.

가을 풍경을 만끽하며 나와 아내는 천천히 아주 여유롭게 걸었다. 한들거리며 손을 흔드는 한 떼의 코스모스에 눈인사하며 지나자 다시 왼쪽으로 핑크 뮬리의 붉은 물결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고운 색깔과 몸짓에 한참이나 빠져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와서 시민의 숲 쪽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우리는 ‘칸트의 산책길’이라고 쓰인 푯말을 보았다. ‘칸트의 산책길이라니,’ 하고 내가 화살표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자 나무판을 이어 만든 작은 산책길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그 길 위에 커다란 동그라미의 출입구를 가진 정사각의 철판이 서 있었다. 동그라미 출입구를 통해 그 안쪽 맨 끝에 놓인 벤치에 동상이 하나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앉아있는 동상이 칸트일 것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동상을 보러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갔다.

칸트의 산책길
다리를 겹치고 단정하게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는 동상은 역시 칸트였다. 비록 동상이었지만 그의 앞에 서자 나는 거의 삼백 년 전 그가 태어났던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프로이센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독일철학의 초석이 되었고 오늘날의 사상가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가 지금 이 양재천의 냇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그가 태어난 도시 쾨니헤스베르크를 벗어난 적이 없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엄청난 학문의 성취를 이룬 그를 생각할 때 별안간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태어난 나라가 너무 좁고 복잡하다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 좋다고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며 틈만 나면 세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았지만 아직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나는 평생을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심오한 사상의 세계를 구축한 칸트를 생각할 때 비록 동상 앞에서이지만 머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휩싸고 지나가는 그 오후 가을바람은 분명 싸늘했겠지만 그 바람 속에 선 나는 가슴 속에서 계속 솟아나는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직 철학 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서 있는 내가 측은해 보였던지 문득 동상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하고 고개를 드는 내 머릿속에 ‘우리는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오직 철학 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고 한 칸트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전에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던 그 말은 그날 그의 동상 앞에서 유난히 머릿속을 울리며 맴돌았다.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오직 철학 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다시 입 속에서 읊조리며 나는 과연 오늘날 철학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어서 과연 철학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를 때 그냥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 그리고 요즈음 베스트셀러의 서가에서 쉽게 발견되는 인문학책들에서 논의되는 철학은 과연 칸트가 이야기한 철학과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철학 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는 칸트의 말은 아마도 철학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아니면 인문학책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은 고대의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출몰하였던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론을 요약해 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것들을 읽고 외우려 하면서 우리는 철학을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칸트는 ‘우리는 철학을 배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철학은 역사가 아니기에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기에 철학을 배울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철학 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들의 이론을 적용하여 왜 그들이 그런 이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그 의문에 대한 사색을 시작한다는 뜻일 것이다. 철학이 원래는 삶의 일인데 언젠가부터 잘못되어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먼 곳에서 외롭게 서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귀한 가르침을 배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별안간 나는 다시 현재의 나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뉴질랜드로 옮겨가 그곳에 삶의 둥지를 튼 지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온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을만 되면 향수병에 걸려 고국을 찾으면서도 삶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나는 그야말로 나이 든 철부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칸트는 살아생전엔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이론을 정립하여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동상(銅像)의 몸으로 고향을 떠나 여러 나라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로 그들의 삶을 성찰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이제 그만 가겠다고 칸트에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저만치 흩날리는 갈대밭 속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던 아내가 내게 손짓을 했다.

“칸트에게 강의 들으셨나 봐요, 그렇게 불러도 안 오시고” 하며 내가 가까이 가자 아내가 추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 미안해요. 뭣 좀 생각하느라고 그만.”하고 얼버무리며 나는 아내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고 시민의 숲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걸으면서 나는 이번 여행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돌아가면 이제는 여행을 좀 자제하고 칸트처럼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규칙적으로 산책하며 사색에 빠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다 치열한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철학도가 아니라 철학은 잘 모른다고 그동안 생각해 왔었는데 ‘철학 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는 칸트의 말에 힘입어 삶 속에서의 철학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문학도 음악도 결국은 삶을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것이라는 깨달음도 새삼 다시 왔다. 이제 돌아가서는 더욱 열심히 살면서 삶을 통해서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글도 쓰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늦가을 양재천 산책로에서 만난 칸트가 그날 오후 내게 던져준 말없는 가르침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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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