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이민

이번 호는 역사신학, 특히 종교개혁과 관련된 이민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이 글은 안교성의 “칼뱅의 난민 사역과 한국교회에 대한 함의”를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을 더해가며 이야기할 예정이다.

안교성은 난민과 칼뱅을 연결하는 연구물들을 글의 초입에 간단히 나열하고 있다. 이때에 중요한 것은 칼뱅의 목회와 사역이 난민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인 연구물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부분 종교 난민과 정치 난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칼뱅도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칼뱅은 프랑스인이었지만 제네바를 거점으로 하여 종교개혁을 전개한 종교개혁자였다. 칼뱅이 종교박해로 인하여 조국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의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교성은 칼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캘뱅은 “자신이 난민”이었으며, 자신과 함께 종교적 박해로부터 피난의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한 “난민 목회자”였다.

더불어서 안교성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칼뱅은 또 다른 제세례파가 종교 난민으로 흩어져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즉, 칼뱅은 난민인 동시에 난민을 보살피며, 난민을 양산한 삶이다.

자유도시
당시의 자유도시들은 종교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들이었다. 특히 칼뱅의 사역의 주무대가 되었던 제네바는 현재 수많은 국제기구가 자리한 도시로서, 오창룡은 종교개혁, 특별히 칼뱅주의가 국제적으로 평화와 협력을 이끌어가는 도시가 된 이유라고 설명한다.

당시 제네바를 포함한 자유도시들은 중세 가톨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프랑스 왕권으로부터 벗어나는 움직임에서 태동이 되었다. 제네바는 베른과 프리부르와 동맹하면서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1532년 제네바에서 가톨릭 주교를 추방하고, 1536년 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때 오창룡은 칼뱅의 종교개혁 논쟁에 있어서 힘을 얻게 된 이유가 제네바 공화국 내에 늘어난 종교 난민의 수라고 설명한다.

기득권, 가톨릭과 프랑스 왕권으로부터 거리감이 있지만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통해 부와 힘을 얻게 된 당시의 신지식인들은 자유도시로 몰려오게 되었고, 그 결과는 수용성의 확장이었다.

현대의 아메리칸드림으로 대표되는 다문화 도시들이 과거 유럽의 자유도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박해, 종교적인 박해, 경제적인 자유와 더 많은 삶의 풍요를 위해서 많은 이주자들이 제네바에 들어와 정착했다.

난민 목회자와 집사
이러한 제네바에서 칼뱅은 목회를 하면서 “난민 목회자”가 되었다. 칼뱅의 가난한 난민들, 이민자들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인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난민을 비롯한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은 정부만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고 본 것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 또한 그들이 받은 도움에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즉, 자유도시 속 종교개혁의 정신은 단순하게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민자와 거주민들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상호 작용이다. 칼뱅의 교회 직제 가운데 집사를 포함한 것도 이민자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안교성은 난민들을 위한 목회에서 필요했던 구조를 설명한다. 제네바에서는 종합구빈원, 다른 말로 병원을 통한 공적인 복지적 구조와 더불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종교 난민들을 돕는 구조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프랑스 구호기금을 칼뱅은 만들었다. 이것은 국가가 통제하는 공적 기관이 아닌, 개인 중심의 사적기관이었다. 이 때 프랑스구호기금을 받은 사람들은 후일에 그 구호기금의 후원자로 활동했다.

이 프랑스 구호기금의 담당자가 바로 집사로 불리었다. “프랑스 구호기금은 기증한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집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이 운영하였고, 이들이 돈을 걷고 분배하고 수입 지출 모두를 기록하였다.”

난민 칼뱅
이러한 난민을 위한 목회에 칼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칼뱅 자신이 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서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도시였던 제네바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많은 긴장과 차별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예가 칼뱅은 1559년에서야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559년은 칼뱅이 생을 마감하기 5년 전이다. 즉, 오랜 기간동안 제네바의회와 여러 기관에서 일을 하고, 교회에서 목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분은 불완전하였다.

그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의 삶은 프랑스의 개혁교회와 끊임없이 연대하면서 자기 고향 땅을 그리워한 삶이었다.

칼뱅의 이러한 삶과 사역은 뉴질랜드 땅과 수많은 외국 땅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 이민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민자들의 교회가 나아갈 방향도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글의 중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민자들과 이민자 교회의 역할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 또한 그들이 받은 도움에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부여받는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낮은 곳으로 흘러 든 물이, 다시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되면 그곳은 부패한다. 더 이상 흐르지 못하는 물은 생물이 살 수 없는 사해가 된다.

종교개혁, 특히 칼뱅을 통한 기독이민자들과 이민교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받았기에 다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폐쇄성이 아닌, 이민교회가 이 사회에 수용되었던 것처럼, 이민교회는 포용성으로 또다른 약자들과 소외받은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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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균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 신대원, 일반대학원 졸업(한국교회사 전공). 오타고대학교 박사(선교학, 이민자 신학, 종교사회학 전공). 파머스톤노스 한마음교회 담임. 알파크루시스 강사. 현지교회와 이민자를 연결하는 꿈을 가지고, 선교와 이민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한다. 관심분야는 선교학, 이민자 신학, 한국교회사와 아시아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