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다섯째 주 찬송/합동 485장 금수강산 내 동포여
품위 있는 언어쓰기, 올바른 예절교육 운동 벌여야 할 때
요즘 청소년들의 난폭한 언어문화 실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 한 명의 일상 대화를 살펴보면, 4시간 동안 욕설 사용 횟수가 385회로 평균 1분에 한두 번씩 욕설을 하는,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통계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문제아나 불량청소년이 아니라 평범한 학생들이어서 우리집 아이들까지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욕설을 재미로 사용하고 있는 아이들은 언제 욕설을 배웠을까요. 대부분 초등학생 때 배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초등학교 고학년: 58.2%, 초등학교 저학년: 22.1%). 왜 욕설을 할까 물었더니 습관이 돼서(25.7%), 남들이 사용하니까(18.2%), 말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17.0%), 친구끼리 친근감 나타내기 위하여(16.7%), 남들이 만만하게 볼까봐(8.2%)라 답했습니다.
욕설은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게임이나 악플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 인터넷 공간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평상시 아무렇지 않게 재미로 쓰는 외설적인 말부터 영화나 소설 등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욕설문화가 그들을 더욱 부추기는가 싶어 문제입니다.
“금슈강산 내동포여 술을입에 대지마라.
건강지력 손샹하니 텬치될가 늘두렵다.
아 마시지마라 그 술, 아 보지도마라 그 술,
죠션사회 복밧기는 금쥬함에 잇느니라”
내가 청소년 시절 교회에서 부르던 ‘금주가(禁酒歌)’의 1절 가사입니다. 뭐 이런 노래가 다 있냐며 배를 잡고 웃으면서 불렀던 금주가를 새삼 꺼내든 것은 지금 교회에서 ‘금욕가(禁辱歌)’라도 만들어 ‘품위 있는 언어쓰기’를 비롯하여 ‘올바른 예절교육’을 펼쳐야겠다는 생각과 사명감이 들어서입니다.
‘금수강산 내 동포여’를 작사, 작곡한 임배세(林培世)는 1918년 이화학당을 거쳐 미국 오버린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여류성악가입니다. 1920년 YMCA에서 이화전도대 구령회(救靈會)에서 독창을 부른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벌인 금주운동에 맞춰 지은 금쥬가는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한 최초의 찬송곡조로, 1931년 간행된『신정찬숑가』에 수록되었습니다. 합동찬송가 제목분류에는 이 찬송이 ‘절제’로 되어 있습니다.
“패가망신 될독쥬는 빗도내셔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야는 일젼한푼 안쓰려네
젼국술갑 다합하야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슈양 늘식히면 동셔문명 잘빗내리.
텬부주신 네저능과 부모님의 밧은 귀톄
술의독긔 밧지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사회운동으로 뿌린 씨앗으로 “자녀 수양 잘 시켜” “동서 문명 잘 빛내는” 열매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까지도 공교육과 교육열에 찬사를 보내고,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이 어지러운 세상을! 믿는 자여 어이할꼬.
11월 첫째 주 찬송/새 334장 위대하신 주를
로만칼라는 주의 종이란 뜻인 노예의 목줄, 스톨은 멍에
교회에서 성직자나 찬양대원들이 입는 성의(聖衣)는 예배를 보다 정연하고 엄숙하게 인도하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더 쉽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며 자연스럽게 예배 분위기로 집중케 합니다. 그리하여 성의에는 제각기의 의미가 있지요.
요사이 목사님들이 가톨릭 신부들처럼 입는 셔츠의 흰 깃인 로만칼라(roman collar, clerical collar)는 노예들의 목에 걸었던 목 끈이나 발에 채웠던 족쇄를 의미한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종의 신분이라는 말이지요.
카속(cassock)은 성직자의 검정색 긴 겉옷을 말하고, 카속 위에 입는 흰 예복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성의인 알브(Alb)는 헤롯이 예수님에게 입힌 긴 옷을 상기시켜(눅 23:11) 그리스도의 결백과 예언자 직을 상징합니다.
또 소매가 넓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중백의(中白衣, surplice)는 성직자는 카속 위에 입고, 찬양대원들은 평상복 위에 입는데요, 짧고 팔꿈치까지 오는 것은 찬양대용 중백의인 코타(cotta)입니다. 이들은 모두 의로움과 결백, 청결함을 상징하며 진리 안에서 새롭게 된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알브나 중백의를 입고 어깨에 걸치는 스톨(stole) 역시 주님께 대한 복종의 멍에(마 11:29-30)인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곡명 DUDLEY는 영국 동남부의 에섹스(Essex) 주 태생인 브라이언 리치(Bryan Jeffery Leech, 1931- ) 목사가 작사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배링턴 대학(Barrington College)과 노스파크 신학교(North Park Seminary)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말년엔 오클라호마 제일교회를 섬겼지요. 그는 문학과 음악에 재능이 넘쳐 틈틈이 시와 찬송을 짓고, 성가합창곡도 작곡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2백여 곡에 이릅니다.
이 곡은 리치 목사가 1982년 발표한 것을 기초로 1984년 타벨(Roland Tabell, 1934- )이 편곡하였습니다. 관련 성구인 신명기 8장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함 같이 그의 백성에게 관심 어린 훈련이었음을 기억하란 말씀입니다.
이 대목은 때로 광야에서 굶주리게 하심도 교육과정이요, 징계하심도 사랑의 혹독한 훈련과정이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에 대한 오늘의 응답이 찬송의 첫 구절, “나 기억 하겠네”(This is a time to remember)인 것입니다.
이 곡의 클라이맥스는 아홉 번째 마디입니다. “단비와 같은 은혜”, “우리와 함께 하며”의 1, 2절에선 주님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을 나타내고, 3절 “충성된 종이 되어”에선 힘찬 서약과 함께 “교회를 잘 섬기리”라며 확고히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