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가 사라진 교회

한국에서 집회를 하던 중 매우 안타까운 뉴스를 접하였다. 대구의 어느 개척 교회 목사님의 사택에서 화재가 났다. 집은 전소되고 사모님과 두 딸은 큰 화상을 입었다. 큰딸은 화마를 피해 4층에서 뛰어내렸다가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새벽에 일어난 불이라 새벽기도회로 교회에 갔던 목사님만 화마를 피했다. 너무 참담하고 마음이 아팠다. 

주일날 아침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가족의 병원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1천만 원을 바로 송금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가까운 몇 분의 목사님에게 알려서 동참하도록 부탁을 했다. 

한 목사님은 당일 대예배 시간에 이 사실을 알리고 그날 헌금은 화재를 당한 목사님 가족을 돕는 구제 헌금으로 하기로 결정을 했다. 참 마음이 따뜻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배 후 장로님들이 모여 담임목사에게 심하게 항의한 것이다. 왜 당회 결정도 없이 멋대로 구제 헌금을 했냐는 것이다. 물론 교회 절차상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나 구제를 하는 일에 이렇게 인색한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했다. 

담임목사는 당회에 이런 안건을 올리면 찬성할 장로들이 없다고 말했다. 어려운 목사님의 가정을 꼭 도와야겠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목사님은 사임했다. 

나와 동역하는 한 목사님도 1천여 명 되는 교회를 8년간 담임을 하다 결국 사임을 했는데, 이유 중 하나는 구제나 선한 일을 하려하면 늘 장로님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번은 청년들이 모이는 공간의 방바닥이 너무 차서 전기 패널을 깔아 주었는데 그것을 문제 삼아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오직 구제와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사명을 잃어 버리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될 수 없다. 초대교회가 태동할 때에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어려운 자들을 돕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이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형제들이 옆에서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서로를 돌보았다. 그러한 구제 덕분에 초대교회에는 가난한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따라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유언이 더욱 마음을 뜨겁게 한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한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거창한 장례식을 삼가 주시오. 그리고 긴 찬사도 삼가 주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도 말하지 말아 주시오. 나의 학벌도, 그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마틴 루터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다가 갔다고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기 위해, 헐벗은 사람들에 옷을 주기 위해 살다가 갔다고 말해 주시오. 내 생애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다가 갔다고, 뭇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다가 갔다고 말해 주기를 나는 바랄 뿐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신학생의 결혼반지
뉴질랜드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동안이 나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첫째는 경제적인 어려움이고, 둘째는 영어로 학업을 따라 가는 것이고, 셋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달러 쓰는 것도 두려워서 최대한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았다. 학교에 갈 때도 기름 값을 아끼려고 4명이 차 한 대로 카풀을 했다. 

그러나 신학생들 중에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학생들도 있었다. 남태양평 국가인 피지나 솔로몬 등 빈민 국가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다. 이들은 항상 배고파했다. 그래서 나도 어려웠지만 어려운 중에도 한 번씩 집에 데려와 배를 채워 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한국 학생 한 명이 입학을 했다. 30대 초반인데 아주 어려 보였다. 연민이 갈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더군다나 가진 돈이 없어 교회 예배당에서 먹고 자곤 했다. 시간이 좀 흘러 왜 이곳에 신학 공부를 하러 왔는지 물어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어렵게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무당이었고,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 머리는 좋아서 서울대학교를 다녔다. 사회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 사기에 연루되어 몇 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복음을 듣고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뉴질랜드까지 왔다고 했다. 너무 안타까워서 잘 챙겨 주었다. 나를 늘 형님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본인이 가장 아끼는 것인데 나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가져왔다. 시편 23장을 그린 커다란 유화였다. 보기에도 보통 그림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그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감옥에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화가를 만났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이 화가도 수감 생활을 했는데, 함께 신앙을 가지게 되고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선물로 이 그림을 그려 주었다고 했다. 감옥에서 재료가 없어 박스를 뜯어 붙여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작가를 절대 밝히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했다고 했다. 

평생 본인이 간직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고 이곳 뉴질랜드까지 그림을 가져왔는데 내가 베풀어 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 귀한 그림을 나에게 꼭 주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이 그림은 내 사무실에 걸려 있다.

그는 힘들게 신학 공부를 하는 중에 어느 교회에서 한 자매를 만났다. 그리고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뉴질랜드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결혼식을 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친구가 갑자기 날을 잡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무엇이라도 도와줘야 할 것 같아서 물어 보았다. 결혼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도 학생으로 1달러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니 결혼반지는 너무나 버거운 부담이었다. 그러나 결혼반지도 없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최소의 비용으로 결혼반지를 장만해 주었다. 500달러가 들었다. 

일반인들에게는 하찮은 예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전 재산과 같은 귀한 선물이었다. 이 반지를 끼고 둘은 결혼을 했다. 일평생 믿음 안에서 행복하기를 간절히 빌어 주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