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Existentialism)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existence)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만이 지닌 특수한 존재 양식을 뜻합니다.
즉 인간은 사물처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그 존재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사물과는 구별하여 특별히 실존이라 규정합니다. 이전의 인간 이해는 “본질은 언제나 실존에 앞선다”는 원리에 의해 이해되어 왔습니다.
만물이 있으려면 그 원형으로서의 이데아가 먼저 있는, 즉 본질은 언제나 만물에 앞서 있으며, 인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말합니다. 비유컨대 인간이란 사물처럼 기성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이미 결정된 방식에 따라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소외와 불안의 시대 상황 속에서 개성과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일상에 매몰되어 기성화 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인간의 본래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문제 삼고 거기에 관심을 쏟으면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결정해 가는 존재(실존)로서 삶을 회복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사는 인간을 ‘진정한 자기’, 또는 ‘본래적 자기’라고 부릅니다. 키르케고르나 야스퍼스와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 ‘실존’을 회복하게 만드는 계기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좌절과 절망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실존을 꿈꾸는데, 그것을 ‘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 ‘실존’을 회복하는 계기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 반응하여,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나, ‘무’(無) 위에 떠 있는 자신의 인생을 인식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심의 소리와 ‘무’에 대한 감정에 반응함으로써 인간은 일상적이고 퇴폐적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실존적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군중 속에 묻혀 진지한 자기반성 없이 일상적이고, 기성화 된 삶을 살아가기 쉬운 현대인들로 하여금, 부단히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해 가는 자기, 즉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도록 촉구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실존
마틴 부버의 사상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버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모든 참된 삶은 만남(Meeting)이다” 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만남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빗대어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무한히 고독한 존재이기에, 만남에 대한 애끊는 향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만남을 통해 존재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온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만남은 결코 존재의 모자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남이 존재를 발견하게 한다.”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되는, 즉 나를 온전히 존재하게 만드는 ‘너’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는 기존 철학의 ‘나’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얼굴과 얼굴,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진정한 ‘만남’에 참여하고 난 뒤에 ‘참된 삶’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이러한 ‘만남’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인생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의 문제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조직체로서의 사회만이 있고 인격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의 삶은 이렇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 우리의 본래적 운명이 회복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이에 해답을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마틴 부버의 실존주의 사상이며, 부버의 대표적인 저서『Ich und Du』가 의도하는 바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이란 무엇보다도 ‘만남’ 혹은 ‘관계’로서의 실존입니다.
부버는 인간을 한낱 고립된 실존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두 가지 근원어(primary word) 관계, 즉 ‘나-너’(Ich- Du)의 관계 속에서 ‘나’이거나, ‘나-그것’(Ich-Es)의 관계 속에서 ‘나’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그 사람 하나만을 뚝 떼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무엇인가 깊이 알려면 그 사람의 ‘관계’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요컨대 사람의 본색은 ‘나-너’ 혹은 ‘나-그것’과의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갖는 태도(attitude)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나’가 어떤 불변하는 실체로서 어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는 관계에 따라 바뀌는 상황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진정한 나를 발견케 하는 ‘나-너’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부버에 따르면, 자연, 사람, 정신적 존재들(spiritual beings) 등 세 가지 영역에서 성립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버는 한 그루의 나무와의 관계에서도 은혜가 개입되면 그 나무와 ‘나-너’의 실존적 관계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너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나-너’의 관계는 서로에게 능동인 동시에 수동으로서 상호성(mutuality)을 갖습니다. 만남(Meeting)은 나와 너의 존재론적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선택당하는 상호관계, 즉 전 인격을 건 행위이기에 수동인 동시에 능동인 일체- 상호관계가 성립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너’에게 영향을 주듯, 나의 너는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와 너의 관계는 직접성(directness)을 갖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상대를 목적과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어떠한 개념 체계, 예비지식, 환상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즉 어떠한 수단의 개입도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온갖 수단이 사라질 때 진정한 만남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나와 너의 관계는 시간적 현재성(presentness)입니다. 현재성은 나의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너’의 관계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추상적인 시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참되고 충만한 ‘나’가 드러나는 현재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삶, 즉 나와 너의 관계가 실현되고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를 뜻합니다.
나와 그것(Ich-Es)의 관계
부버는 ‘나-그것’의 관계가 갖는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그것’의 관계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입니다. 이때 주관은 일방적이며 능동적으로 객관을 대상으로 소유하고 수단적 관계로 취급하기 때문에 자연히 객관은 피동적 성격을 띠게 되며 주관에 의해 지배받게 됩니다.
둘째, ‘나-그것’의 관계는 경험과 이용의 관계입니다. 나와 맞선 대상이 어떠한 것이든 관계없이, 설령 그 대상이 신(God)이라 할지라도 일단 나와 그것의 관계에 있어서 경험과 이용의 대상입니다. ‘
경험’은 계속 세계를 재구성하고 ‘이용’은 다양한 목적을 세계에 부여합니다. 이 경험과 이용을 통해 인간의 생활은 유지되고, 구제되고, 발전되어집니다. 더불어 ‘그것’ 세계의 외부적 성장에 비례하여 그것을 이용하고 경험하는 ‘나’의 능력도 향상합니다.
셋째, 나와 그것의 관계는 과거 안에만 존재합니다. 수없이 많은 내용물에 둘러싸여 있을 뿐, 어떠한 너와도 대면하고 있지 않은 나에게는 현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경험하고 이용하는 물건만으로써 만족하는 사람은 과거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했거나 내가 사용한 어떤 것에 내가 만족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 그 만족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경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라고 하는 것이 현재 상대하는 대상이라면 그것이라고 하는 대상은 과거의 시간 속에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 ‘나-그것’의 관계는 간접적입니다. 다시 말해 이 관계는 과학자들이 어떤 대상을 연구할 때 그저 연구의 대상, 관찰의 대상으로 삼고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어떤 대상, 어떤 인물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의 행적과 사실들을 철저한 타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나는 항상 뒤로 물러서 있는 초연한(detachment) 상태에 있습니다.
요컨대 나와 그것의 관계에 있어, 나는 자연을 물건과 같이 보아 이를 정복하는 입장에 있으며, 세계는 나에게 단지 이용과 체험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모든 것, 즉 자연도, 인간도, 하나님도 다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부버가 나와 그것의 관계를 가치가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관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뿐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도 인간 생활의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점입니다. 이는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내용만 파악해도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며 나와 너의 관계가 없는 삶이란 무의미함을 강조하면서, “나와 그것의 관계가 없는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