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배경
영지주의는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합일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글에서 정리되는 것들이 모든 영지주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지주의 문헌은 소실되었고, 기독교 영지주의에 대한 자료는 교부들의 반박에 나타난 설명들로부터 얻어집니다. 영지주의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 전쟁(BC 334-323년)을 통한 동·서방의 문화 융합(헬레니즘)으로 시작되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거의 천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습니다. 여기서 ‘동방’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의 접경 지역까지 아우르는 고대 근동 세계를, ‘서방’은 에게해 연안의 그리스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서방의 이성적, 철학적 사상이 동방의 신비적, 상징적, 제의적 종교를 만나 다시 한번 영적·종교적으로 융합됩니다. 이는 이성의 틀을 가지고 보이는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와 증명만이 관심사였던 서방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는 동방의 영적 종교들은 매우 매혹적으로 다가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1~2세기의 지중해 세계는 기독교의 태동으로 심오한 영적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종말론 사상과 함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기독교 분파가 생겨났으며, 영지주의 분파 또한 그리스, 바벨론, 이집트, 이란의 기원과 유대교의 신비적 종교 요소를 혼합하여 헬레니즘 궤도 안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기독교의 방식과 형태로 세워 나갑니다.
영지주의 주된 관심은 영혼으로 영혼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삶과 세상, 그리고 영혼에 대하여 종교적 본질을 추구합니다. ‘왜 인간은 이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은 영지주의 기본적인 교리를 형성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상징, 곧 은유와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었으며 상징적으로 난해한 표현들이 많아 올바른 의미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시리아 영지주의’인 발렌티누스(Valentinus, 약 100-160/180)는 창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의 곤경(predicament)과 인간이 세상의 삶에서 겪는 완벽한 자기소외(self-alienation)를 설명하며 궁극적인 구원의 길을 모색합니다.
반면 영지주의 한 분파에 속하는 마르키온(Marcion, 약 85-160년)은 ‘영지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라고 주장하던 다른 대부분의 영지주의에 반해 구원은 ‘믿음’(faith)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을 강조하며, 이는 삶의 경험으로 보증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리고 1세기 후에 등장한 ‘페르시아 영지주의’인 마니(Mani, 약 216-276)는 조로아스터교의 우주 진화론, 기독교의 종말론,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의 삶의 윤리와 금욕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교리체계를 이룹니다. 영지주의 대표적인 특성이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여러 종교의 요소들을 혼합하여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채워주었다는 점입니다.
영지(gnosis)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영지’ 혹은 ‘지식’(knowledge)이란, “초월적인 신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숨어 있으며 자연적인 개념으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신에 대한 지식은 초월적인 계시와 조명이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초월적인 신에 대한 지식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지식이므로, 진리에 대한 수용은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전승을 통해서, 또는 내면의 조명으로 이해됨으로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독일의 한스 요나스(Hans Jonas)가 밝히는 ‘영지’는 ① 영지주의적 신화와 연관된 비밀의 존재에 대한 지식 ② 세상의 기원과 신적 역사 ③ 세상의 역사 안에 있는 인간의 상태 ④ 구원의 본질 ⑤ 교리의 체계적 구성 ⑥ 영혼 미래의 상승 방법과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올바른 삶에 대한 지식 ⑦ 길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신성한 것들에 대한 지식과 효과적인 교리 등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이란 신에 대한 특별한 지식과 인간의 내면 안에서의 깨달음을 말하며, 영지를 소유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았고 더 나아가 구원 자체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는 영지주의 구원과 기독교 구원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의 구원은 인간의 내면을 해방하고 신성하게 만드는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영지’는 이 세상의 질서, 역사, 발생의 근원, 사람의 구원과 같은 것들이 존재의 신성한 영역의, 모든 개념을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지주의 다양한 분파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은 자신을 ‘영지주의자’(gnostics)라 불렀고, 이것은 그들만이 지식을 안다는 일종의 표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이성적 학문, 혹은 이성적 철학의 인식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영지를 아는 것이 신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영지를 가진 자가 곧 ‘신’이라 주장합니다.
즉 영지는 깨달음을 통한 인간 내면의 해방을 말하며 이것을 구원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영지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초월적인 신이 될 수 있으며 무지하고 악한 세상으로부터 자기 내면을 해방한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영지주의 문헌에서는 종종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 혹은 ‘자기 자신’(자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는 믿음(faith)을 크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는 고백은 아주 중요한 증언입니다. 하지만 영지주의 안에도 ‘피스티스’(pistis)라고 불리는, 믿음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정통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경험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자신을 해방으로 이끄는 내부의 지식을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에서 자신을 해방해 마침내 물질세계의 울타리 너머로 자신을 실어다 줄 내면의 앎을 열망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원론(dualism) 사상
영지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빛과 어둠이 대립하는 급진적인 이원론 사상입니다. 영지주의 문헌에서 세상을 악한 것으로 이해하며, ‘추락하다’, ‘떨어지다’, ‘타락하다’는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삶의 나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빛이 어둠으로 떨어진다”는 초기 사상은 “어둠에서 빛이 밝게 빛난다”로 발전합니다.
세상에서 인간은 고통과 소외 감, 외로움을 느끼고, 그들에게 있어 세상은 선한 것이 아닌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벗어날 수 없는 감옥과 같은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이 세상을 벗어나려 하고, 신성의 회복만을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현실 세계나 인간의 육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더 나아가 현실 세계의 온전한 회복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원죄 교리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부인합니다.
영지주의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 이원론 성향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상실하게 합니다. 이에 당연히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아 윤리적인 ‘덕’이라는 개념이 없어 기독교 신학의 ‘성화’(sanctification)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훈련되고 연습되는 덕의 존재는 ‘무의미’하며, 신의 성품을 회복하고 신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성화’ 교리보다 자신들의 영지(신성)의 회복만을 요구합니다.
영지주의에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지켜보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방관자(절대 타자)로 비추어집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의 회복이나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온전한 구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영지주의는 때때로 ‘허무주의’(Nihilism)로 ‘성화’, 즉 ‘덕’의 개념이 없고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어떠한 규범과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던 헬레니즘 시대에 바벨론의 점성술은 더욱 널리 퍼지게 되는데, 특히 이집트에서 이 점성술은 영지주의자들의 숙명론적 사고관(우주적 운명론, heimarmeme)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영지주의가 허무주의라면 왜 수많은 기독교인이 영지주의에 빠지게 되었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희망이 없는 종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저마다 지향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은 그 목표를 성취하려는 희망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도 구원에 관한 희망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영지주의를 허무주의라고 한 까닭은 영지주의에는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 신은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절대적인 우주, ‘-저 너머’에 있는 분으로서 신적 개념에서 존재보다 ‘무’(nothingness) 성격을 더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허무주의라 말한 것은, 단순한 절망이나 무기력 상태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하나님의 현실성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영지주의에서 고유한 특성은 신과 우주에 관한 생각들을 처음으로 체계화하고 분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 깨달음과 특별한 지식을 얻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식의 실용적 측면과 구원적 측면, 그리고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이성적 이해와 사고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헬레니즘 이후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종교적인 사고와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