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 속의 바다

내 가슴 속엔 바다가 있을까? 아주 작은 바다라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있다면 어떤 물을 얼마나 담고 있을까? 그 물속엔 무엇이 있을까? 바다가 가슴 속에 있다는 가정을 하자 여러 가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바다는 항시 모든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사람들은 꿈을 키웠다. 그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 했고, 그 바다를 넘어 저 멀리 미지의 세계를 꿈꾸며 가보고 싶어 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바다 위로 배를 띄웠고 가슴이 여린 사람들은 그 바다를 보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질랜드에서는 어디를 가도 쉽게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차를 운전하다가도 고갯길만 오르면 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산에 오르다가도 허리만 펴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참 고마운 일이다.

20년쯤 전, 이민 초기에 서쪽 해변의 무리와이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문득 무슨 소리가 뒤에서 나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아, 내 눈에 들어온 바다 풍경은 언젠가 보았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내 두 눈을 가득 채우고 검은 모래사장의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부드러운 미풍 따라 들어오는 파도가 흰 포말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 물결 옆을 다정히 어깨를 서로 맞대고 걸어오는 한 쌍의 젊은 연인이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써늘하게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그 아름다운 정경이란!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골프를 끝냈는지 모른다.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환상처럼 신비한 아름다움의 바다였다.

‘음악은 때때로 바다처럼 나를 사로잡는다’라고 보들레르는 노래했지만 나는 즐겨 ‘바다는 때때로 음악처럼 나를 사로잡는다’라고 읊는다. 그만큼 바다는 나의 삶에서 때때로 아니 그보다 더 자주 나를 그 부드러운 물결로 휩싸 어디론가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곤 한다.

바닷가에서 만난 돌고래
얼마 전 햇살 좋은 오후에 아내와 같이 데본포트 바닷가를 걷고 있을 때였다. 날씨가 좋아서였는지 꽤 많은 사람이 바닷가에 나와 있었는데 저만치 앞서 걷던 사람들이 별안간 환성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도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쪽을 바라보니 멀지 않은 가까운 물속에서 돌고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쳐 나가는 것이 보였다.

“돌고래예요, 돌고래!” 아내가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외쳤다. “아니 돌고래들이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나도 뭐라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광경이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물속에서 줄넘기를 하듯 돌고래들이 가벼운 동작으로 접영(蝶泳)을 하듯 솟구쳤다 내려오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돌고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가 먼바다로 사라져갔고 뒤에 남은 바닷가의 사람들은 그 돌고래들이 사라진 바다를 향해 끝도 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때 바다를 향하여 손 흔드는 이들의 마음이 내 가슴에 와닿았고 문득 나는 그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저녁 집에 와서 시 한 편을 썼다.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들을 향해 가슴을 열었다.

열린 가슴으로
푸른 물이 밀려들었고
그 밑바닥 깊은 곳에는
추억처럼 흔들리고 있는 해초들이 있었다.

해초들은
서로 몸을 기대고
살을 비비며
저마다 작은 빛을 내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던 사람들 모두가
해초 안에서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자
그들 모두가 입을 벌려 무어라고 소리를 냈다.

처음엔 속삭임 같던 그들의 소리는
곧 노래도 되었고
천둥 같은 외침도 되었고
감탄도 되고 흐느낌도 되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니
그들의 소리는
평생 내 입을 빠져나간 소리의 메아리였다.

소리 소리 소리
내가 냈던 소리는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가슴속 나의 바다 속에 녹아 있었다.


가슴이 열리자
사람들의 입을 통해 튀어나오던 그 소리들은
지나간 나의 삶이었다.

나는 별안간 부끄러워져
가슴을 닫고 싶었지만
가슴은 닫히지 않았고
열린 가슴으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추억처럼 흔들리던 해초도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

내 가슴은 그냥 열려있었다
물 빠져나간 갯벌이었다
갯벌 위엔 지난 나의 삶이 해초처럼 널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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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