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지난 호의 글을 이어갑니다. 대심문관을 통해 이반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신이 인간에게 자유 대신 빵을 위한 기적(miracle), 눈에 보이는 신비(mystery), 복종할 수 있는 권위(authority)를 제공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물질로 대변되는 세속적 가치를 채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준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 믿음으로 신의 존재와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대심문관은 이를 부정하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과 같은 세속적 가치로 신앙의 기적보다 빵을 제공하는 기적을 행한 자를 경배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기적보다 더 중요한 신비입니다. 대심문관은 인간에게는 그저 물질적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라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다면 인간은, 설령 그의 주위가 온통 빵 천지라 할지라도,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남느니 차라리 스스로 박멸할 것이다”라고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 스스로 올바른 삶의 좌표와 도덕적 삶의 지표를 인식하여 나아갈 안목이 과연 있느냐는 점입니다. 신에게서 주어진 자유가 부담스러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를 제시하는 자에게 자신의 도덕과 양심을 맡기고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심문관은 신이 인간에게 이성과 양심의 자유를 주기보다 삶의 지표를 명료하게 제시하는 눈에 보이는 신비를 제시했어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마지막으로 권위는 모든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궁극적으로는 신 안에서 세계적 연합이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금껏 인류는 “신 안에서 세계적 연합이 어떻게 가능하고, 신앙의 공동체 사회가 어떻게 가능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만이 아닌 전 세계적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카이사르의 칼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황금에 대한 신격화처럼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제국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및 인본주의 체제 속에서 해체와 분열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대심문관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절대 권력을 양산해 냈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유보다는 인류를 화합할 수 있는 권위를 제공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그는 카이사르의 검과 같은 권위로 지상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은 천국의 낙원만을 제시할 뿐 지상의 권위를 제공하지 못했기에 가톨릭교회가 카이사르의 검을 쥐고 인류를 화합해 나갈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이처럼 대심문관은 신이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유가 오히려 불안, 혼돈 그리고 불행을 낳았다고 지적합니다. 신은 인간이 기적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로운 믿음과 삶의 통찰에서 비롯된 신비,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통한 인류 화합의 길을 자유롭게 찾아가길 원했지만, 오히려 인간은 빵을 위한 기적과 양심의 부담을 덜어줄 맹목적인 신비, 그리고 인류를 화합할 카이사르의 권위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상의 빵을 위해 그리고 카이사르와 같은 절대 권력 앞에 자신의 자유와 양심을 반납하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형 이반의 논리에 알료샤조차 흥분하여 동의했던 것처럼, 대 심문관은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래의 가치보다 현재의 쾌락에 몰두하고, 지상의 빵과 권위에 굴복하여 자신의 자유와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신앙을 통한 기적이 아닌 신앙을 위한 기적이 더 필요한 현대인의 모습은 대심문관이 꿰뚫어 보았던 인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하기에 마지막에 재림하신 예수님이 아흔 살 먹은 대심문관의 핏기 없는 메마른 입술에 키스했던 것도 이러한 한계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고통에 대한 동의(pro)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도스토옙스키는 대심문관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일까? 질문을 던진다면, 예수님의 키스는 제5권의 제목 찬과 반(ProContra)처럼 두 가지 의미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Pro)으로서의 키스이며, 다른 하나는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 의미가 그것이 아님(Contra)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키스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메시아 Messiah>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처럼 메시아가 21세기에 재림한다면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메시아가 필요한가? 더 나아가 이 시대는 과연 메시아라는 존재를 믿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2020년 1월 1일 공개된 넷플릭스 콘텐츠인 <메시아 Messiah>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메시아’라는 종교적인 메시지와 현대인들의 신념과 심리,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정보 전쟁을 잘 버무린 작품입니다. 또한,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신의 역사』라는 책에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 이해는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여 있는 표현 불가능한 신의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류가 아브라함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에 대한 역사”라며 종교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잘 표현한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여기서 다루는 종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처럼 신앙(faith)적 차원이 아니라 시청자의 몰입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로서 종교(religion)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해 보입니다.

내용은 전쟁과 테러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알라의 이름으로 신의 말씀을 전파하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매력적인 언변과 믿기 어려운 기적들은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사람들은 그를 아랍어로 ‘메시아’, 곧 ‘구원자’라는 의미인 ‘알 마시히(Al Masih)’라고 부릅니다.

이에, 중동에서 또 다른 혼란을 우려하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Shin Bet와 미국의 CIA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미국 텍사스로, 예측하기 어려운 그의 행적을 추적하며 그의 정체를 밝히려 노력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 거기에 미군의 개입 등 지정학적 국제정치와 종교 분쟁, 현대인들의 심리와 종교성까지 다루는 다층적인 스토리는 이슬람 문화권(팔레스타인), 유대교 문화권(예루살렘), 기독교 문화권(텍사스, 워싱턴 D.C.)을 오가며, 정치 사회적으로 첨예한 지점들을 건드리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알 마시히의 설교에 반응하는 서로 다른 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과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하고 유사한 기적을 보여주는 알 마시히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믿음, 불신, 유보 등 제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바라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파다(민중봉기)가 재발하는 식인데, 이는 세 종교가 기본적으로 메시아의 존재를 긍정하면서도 예수의 존재와 재림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각기 다른 해석을 지니고 있음을 반영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 전반에 걸쳐 알 마시히의 행동과 기적을, 다양한 측면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반박을 제시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알 마시히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신학계에서 상당히 자주 다뤄졌던 ‘예수의 재림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라는 토론 주제를 그대로 플롯에 가져와 사람들이 가질 법한 믿음의 모습과 불신의 모습들을 충돌시켜 관객 역시도 메시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드라마의 포스터에 적힌 “Will he convert you?”란 문구는 “그가 개종케(convert) 하느냐?”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vert’를 뿌옇게 처리하면서 “그가 속였냐(con)?”라는 뜻이 의도한 것처럼, 자신을 ‘신의 메신저’라고 밝히는 이란 출신의 남자를 미국 CIA와 이스라엘 정보부는 그의 정체를 알기 위해 추적하고, 이슬람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의 설교자는 그의 유명세나 능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2천 년 전에도 메시아의 등장에 헤롯 왕과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굶주림과 고통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군중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이뤄낼 구원자로 믿고 따른 몇몇 제자들의 모습은 드라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심문관의 항변처럼 21세기 메시아의 재림을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 각자마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주인공을 대하는 주변 인물들과 대중의 태도들을 보고 있자면 나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똑같이 기적(같은 사건)을 행하더라도 누군가는 믿고, 누군가는 의심하며,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추적합니다. 마치 대 심문관을 오마주(homage)한 것처럼, 알 마시히가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과 CIA 요원, 그리고 미국 대통령과 독대하는 장면과 그들의 반응은 이 시대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들이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대 심문관>과 넷플릭스의 드라마<메시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갈망과 믿음, 그리고 나를 위한 왜곡된 욕망 사이에서 이 시대에 진정한 믿음과 제자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듯합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