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힘의 능력으로

정재권 목사<타우포한인교회>

한동안 저에게 감동을 주었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며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옥중 서신으로 쓴 고백적인 내용의 가사를 한국 찬양사역자들이 개사하여 불렀던 찬양입니다.

“선한 능력으로” 아쉽게도 일부분은 본회퍼 목사의 의도를 잘 표현한 가사도 있지만, 또 일부분은 지나치게 의역되어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에 대한 감성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면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본회퍼 목사의 옥중에서 쓴 편지의 내용에 가깝게 가사를 담은 찬양의 가사 말에 참 많은 감동과 깊은 가슴에 울림을 되었습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되어 온 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나치의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어둡고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더불어 독일교회는 절대군주와 같은 힘을 과시하는 독재자 앞에 무기력하게 교회로 명맥만을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았던 시대입니다.

절대권력 앞에 무너져 가는 교회와 신앙의 허울性. 본회퍼 목사는 나치 정권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여 옥중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1944년경, “선한 힘에 관해서”라는 제목의 고백적 시를 섰던 것입니다. 이 고백 시, 또는 찬양의 가사 말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와 표현들이 저의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세력이나 환경에서도 선한 힘이 함께하시고 함께하는 그대들이 있다면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간다고… 지나간 시간의 어둠 앞에서 주님의 약속의 구원은 이루어지리라고… 그래서 그 “선한 힘”이 우리를 감쌈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기에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롭다는 것입니다.

선한 능력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로마서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신학적인 위대성을 보여주는 단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전적인 회심의 역사로 인하여 의인됨의 의미를 재발견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그리고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삶이란, 생명의 삶이요, 인간과 피조물의 구원을 고대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모든 삶의 매듭들 하나하나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그 힘의 능력, 그 선한 힘의 능력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부터인가 신앙의 본질보다는 신앙생활이 주는 그 성공의 달콤함에 빠져서–과정이나 방법은 중요하지 않은-‘성공 신드롬’에 신앙의 척도를 맞춰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축복’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祝福’, 하나님께서 누군가/어떤 것에 빌어서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신다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의 용어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기도생활을 하면서 100% 기도 응답이라는 신화에 빠져서 내가 기도한대로 100% 이루어 주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구하고, 그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그렇게 응답받지 못할 때는 ‘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좌절감에 실족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어느 분의 간증적 고백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은 ‘퍼즐 같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즉 삶의 단편을 걸어갈 때마다 그 삶의 단편에서 힘겨움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뒤돌아보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지금의 자리, 현재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퍼즐을 맞추어 가시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분의 고백 역시 본문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의 옥중 시의 맥락과 연결해 보자면, 선한 힘의 능력으로, 그 힘이 모든 상황, 모든 여건을 넘어서 합력하여 주의 선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하루하루가, 이민의 삶의 한날 한날이 힘겹게 넘어갈 때마다 우리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여기까지 왔지?’, ‘하나님은 정말 나의 기도를 듣고는 계시는가?’, ‘신앙생활은 하는데 나에게는 왜 복을 주시 않는 걸까?’, ‘나의 신앙생활은 좀 부족한 것이 많은 것인가?’, ‘난 참 운(재수가)이 없어’, ‘우리교회 〇〇〇집사(권사)님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돈도 잘 벌고, 아이들도 잘 자라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러나 여러분!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도의 내용대로 되었다고 성공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그 부르심에 삶을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축복보다는 은혜가 더 성경적이라 생각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만이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저버리고, 제자로서의 삶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공동체를 향하여 ‘값싼 은혜’라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값싼 헐값으로 처리한 은혜의 천박성을 경고하였습니다.

누가복음 7:43-47에서 한 여자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 후에, 주님과 바리새인의 대화가 나옵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두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졌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어서 둘 다 탕감해 주었다.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죄 사함을 받고 나서 사랑이 많아졌다”(눅7:43-47).

죄 사함에 대한 진정한 고백, 주님께 그 사랑의 고백을 한 여인의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은 입은 인생의 모습, 곧 은혜였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죄사함의 역사를 알지 못할 때는 ‘은혜’도 모르고, 부르심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고, 죄사함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알 때 우리는 그 구원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우리 인생이, 철학자 하이데커의 용어를 빌리자면, 비록 세상에 던져진 ‘被投(피투)’된 존재이지만, 그 피투성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은 입은 인생으로, 그 사랑의 역사에 참여한 인생이 됨으로 인하여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의미성의 회복이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사랑, 은혜의 역사에 나의 삶이 이어짐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조각 조각이 여기저기 난잡하게 아무 의미 없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능력의 힘으로 우리 삶의 조각들을 꿰뚫고 이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민의 땅 뉴질랜드에서 삶을 꾸려가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원불교(원망, 불평, 교만) 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도 살아가는 하루의 시간들, 그 단편들이 만들어 가는 삶의 시간, 신앙의 역사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감으로 인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고백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감리교 공동체를 만들었던 존 웨슬리 목사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면 세 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나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너에게 준 물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 나에게 준 물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너에게 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나의 자녀를 어떻게 가르치고, 양육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물질, 자녀….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주의 선한 능력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