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하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이야기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끌어내기 위한 세례 요한의 출생 이야기로 시작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서론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 중 주목해 볼 점은 요한복음 1:1-18에 나타난 ‘로고스(λόγος) 기독론’입니다.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포함,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 광범위하게 알려진 비기독교 저술가들이 가르쳤던 로고스 개념을 요한은 세심하고 담대하게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서문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가 신적 로고스라는 사실이 성서 안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로고스 개념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게 그의 눈으로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자가 서두에 ‘로고스’를 이야기하면서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분명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이미 ‘로고스’에 대해 익숙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에 대한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는데, 헬라적 사상의 산물로 보는 경우와 유대적 사상을 그 배경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로고스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리투스(BC 535~475)에 의해 철학사상에 최초로 도입된 개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들은 연설(Speaking), 주장(Assertion), 이야기(speech), 실체(subject), 사물(thing), 설명(account) 등 열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이 용어를 철학적 개념으로 이해할 때는 ‘우주의 영혼’, ‘이성’ 등과 같은 대원칙이기도 하고, ‘창조적인 에너지’ 혹은 ‘세상의 정신’과 같은 그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셈어 계열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의 단어가 있고, 70인 역의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다바르’와 아람어 ‘멤라’를 로고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했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순간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여기느냐?’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로고스’의 선재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창조와 관련된 로고스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먼저, ‘태초에’라는 표현이 70인 역의 창세기 1:1과 문자적으로 동일한 관용구이지만 문맥상의 의미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역 개정에는 없지만 1절에만 3번 나오는 ‘있었다’와 3절의 ‘되었으니’라는 동사를 유추해 보면 요한복음의 ‘태초에’는 창세기 1:1의 시·공간의 시작을 내포함과 동시에 그 이전의 영원이라는 무시간적인 시간을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요한은 ‘태초에 로고스가 되어졌다’고 표현하지 않고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라고 함으로 그가 선재적(pre-existence)인 존재임을 증거합니다.
이때 ‘있다’라는 표현을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 로고스가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로고스가 없었던 때는 없었으며, 존재하는 것 중에 그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기원과 인격적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로고스 기독론을 통해 선재론을 도입하고 있으며,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사역 전체에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재론이 요한복음서 기독론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공관복음서의 인자가 오실 자, 고통받을 분, 그리고 오신 분으로 등 선재 사상이 없는 데 반해, 요한복음서 인자 개념은 선재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선재한 로고스가 육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지만, 때로는 선재와 신성이 너무 강조되어 그의 십자가 수난은 창조 이전의 영광을 되찾아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예수님의 영광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선재한 로고스가 육신이 된,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세상에 왔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성육신 개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현설적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나 보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에게 적용된 로고스의 의미는 단적으로 선재자의 우월성입니다. 또한, 몇 차례에 걸쳐 세례 요한(1:30), 야곱(4:12-14), 모세의 율법(8:3-11), 그리고 아브라함(8:53-59)에 대한 우월성의 논리로 전개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유대교에서는 그 사람의 시간상 서열이 그 사람의 권위와 서열을 결정하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보다 뛰어난 이유를 선재자로 그들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데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선재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부분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와 대조되는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예수님의 기원과 인격, 그리고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의혹과 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수군거림이 있었는데(7:12), 그는 못 배웠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칠 수 없음을(7:15), 예언자가 나올 수 없는 갈릴리 출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될 수 없음을(7:52) 말합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기도(8:25) 합니다.
이러한 논쟁적 상황을 고려할 때, 요한이 예수님의 선재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의도를 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서론에서 ‘먼저 계신 자’(1:15), ‘위로부터 보냄 받은 자’(1:18), 그리고 ‘위로부터 온 자’(3:31) 등 다양하게 표현된 예수님의 선재와 우월성으로 예수님의 권위에 대립하는 모든 것들을 무력화합니다.
생명과 빛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요한복음에서 로고스와 관련하여 독특하게 많이 사용된 것이 ‘생명’입니다. 요 1:4에 나타난 첫 번째 ‘생명’은 정관사 없이 사용되어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강조된 생명은 로고스를 통해 존재하게 된 모든 생명과는 대조적입니다. 즉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시는 예수님은 그 자신이 생명이시며 동시에 죄로 타락한 이래 생명을 잃고 암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로고스인 예수님이 생명으로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로고스의 속성이 하나님의 생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지상에 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받는 생명이 아니라 죄의 유혹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며(3:16), 이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6:51)고 선언합니다. 또한, 그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는 생명을 소유(6:53 이하)하고, 그가 생명을 주되 풍성하게 주기 위해 오셨으며(10:10),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권세도 다시 취할 권세도 있음(10:18)을 설명합니다. 그가 주는 생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10:28), 자신이 생명이라고 선포(11:25; 14:6)합니다.
그러한 표적으로 생명의 주로서 나사로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으며(11:44), 최종적으로 20장에서는 죽음을 넘어선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서론에서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언함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임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과 연결한 것처럼, 빛과도 연결 짓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주목할 바는 요한이 시제를 변경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과거형을 주로 사용했으나 이제부터는 현재형을 사용합니다. 요한은 ‘비추다’(shines)를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을 사용함으로, 그 빛이 계속 활동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이 빛이 과거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서 역시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로고스를 통해 존재한 이 세상에 어두움이 있으며, 빛이 계속 비추고 있는데도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세상은 빛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어두움이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빛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님이 자신을 알지 못한 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지만 결국은 어두움을 이겨 승리하실 것임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빛이 있으면 물러가게 되어 있고, 빛은 분명히 어두움을 이깁니다.
빛이요, 생명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진술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인 예수님의 위치를 보다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