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최수진 목사<타우랑가드림교회>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몸에 입고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이며, 그에 따라 주어지는 복이 무엇인가를 전해줍니다.

또한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 중에서 무리와 제자를 구분 지으시고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께 인생을 걸기로 작정한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비밀을 가르쳐 주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8복의 진리를 나누시는데 그것은 곧 어렵고, 힘든 제자의 길, 구별된 삶을 살기를 결정한 이들을 진짜 축복된 인생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준, 새로운 삶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기 원하면 “너희가 이렇게 살아야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고, 힘겨운 그 삶을 끝낼 수 있고,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한 축복된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현재 속으로, 그리고 우리의 시간 속으로, 우리의 일상 속으로 가깝게 가져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라고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신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 속으로 들어와 있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누리길 원한다면 가난한 심령, 가난한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의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헬라어에는 ‘가난하다’란 말을 나타내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는 ‘페네스’(penes)란 말인데요, 이 말은 “남는 것이 없는 사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을 말하는데, 남을 도와 줄 여력은 없으나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상태의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넉넉하지 않고, 충분하지 않은 그런 가난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에 비해 ‘프토카스’(ptokas)란 말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를 나타내는데요…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외부로부터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철저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넉넉하거나, 충분하지는 않아도, 근근이 먹고 살 정도는 되는 어려운 가난이 아니라, 대신 의지할 사람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팔복의 말씀에는 바로 이 ‘프토카스’란 말이 사용되면서 ‘절대적 빈곤상태’를 말하는데 무엇이 빈곤한 상태입니까? 즉 영적인 가난과 마음이 가난한 상태여야 한다는 겁니다. 결코 물리적 가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마음이 ‘프토카스(절대적 빈곤)’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즉 자기 자신의 완전한 무능력 상태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존되어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

쉽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외에 피할 곳이 전혀 없는 사람,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놓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오직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사람…이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결국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가슴을 치며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고, 찾는 자들이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절대로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내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Nothing이 되고, 무능력한 상태가 되어야 그제서야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 스스로가 완전히 비천한 존재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늘 우리 자신만 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경험했던 것만 보며 사는 겁니다. 이런 것들에 기대어서 살아가고, 여기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나의 것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으니 복의 근원되신 주님의 공간이 생기질 않는 겁니다.

가만 보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가장 불안정할 때가 언젠가? 생각해 보면 고통과 고난이 찾아올 때가 아닙니다. 대신 우리의 마음이 부요할 때입니다. 하는 일이 잘될 때입니다. 갖고 있는 소유도 많고, 주변에 사람들도 끊이지 않고 걱정할 일 하나 없이 삶이 그저 평화로울 때!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사실은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때는 부단히 애쓰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것들이 완전히 무력해지고, 아무런 쓸모 없는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이 온전히 보여지지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마음의 여유가 있고, 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갔던 탕자아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많은 재산을 갖고 집을 나가서 흥청망청 신나게 살던 이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갖고 있던 모든 돈을 다 탕진해 버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던 말 그대로 돼지들이 먹는 열매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눅 15:16-17)

그전까지는 가진 게 많고, 부요하다 보니 아버지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요.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가난해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부요와 충만함을 이해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절대로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66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아보려니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은혜를 주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피할 곳이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하고,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임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하다고 할 때 하나님이 친히 나의 강함이 되어주시고, 내가 가난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부요함이 되어 주시는 축복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삶이 “복이 되고,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