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대재앙과 원인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natural disaster)나 혹은 감당할 수 없는 개인의 고난 앞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나 섭리와 연결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말처럼 대재앙의 고난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시도는 고난당하는 당사자나 그런 비참한 절규를 언론으로 전해 듣고 지켜보는 제 삼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거의 본능이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대재앙이 발생할 때 누구를 막론하고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들은 대재앙 그 자체로 말미암은 심적 부담과 아울러 이해할 수 없고, 납득되지 않는 고난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심적 부담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대재앙 자체로 인한 고통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나 원인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기독교 신학은 어떻게 답할까요?

신학에서 재앙과 그에 따른 고난을 하나님의 개입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이유는, 성경 자체에 대지진이나 기근과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나 개인의 고난을 하나님의 개입이나 섭리와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재앙과 이에 대한 원인을 지진의 예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첫 번째 사례는 출애굽기에서 보이는 10가지 재앙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을 위하여(사 29:6, 겔 30:19) 그리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경고와 신앙의 각성을 끌어낼 목적으로(민 16:31) 발생하는 지진에 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현현으로서 대지진을 묘사하는 말씀들(출 19:18, 왕상 19:11~12, 행 16:26)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옛 세계의 붕괴와 새로운 천지창조의 개벽을 알리는 묵시록적인 차원의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관한 구절들(마 24:6~9, 벧후 3:10, 계 6:12, 11:13)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상의 세 가지 사례 외에도 자연재해와 대재앙을 하나님의 활동과 연관시켜서 해석할 수 있는 많은 구절이 있고, 이는 풍부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대표적으로 욥의 고난이 있는데 이는 다음 기회에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근거로 오늘의 상황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려 한 일곱 가지 모델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그런데도 재앙과 같은 고난 속에 깔린 의미나 해석, 그리고 그 파장은 매우 다양하여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기에 이러한 해석들이 얼마만큼 신학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징계 모델(retaliation model)
성경에 가장 많이 적용되는 모델로 현재의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이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전능성이 강조됩니다. 이 모델의 전형적인 입장은 고난 중에 있는 욥을 향한 세 친구의 비판 속에서 잘 나타나며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신명기적인 역사관 속에서도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성경에 등장하는 고난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많이 적용되는 모델입니다.


하지만 고난의 원인을 인간이 지은 악에서 찾는 이러한 해석모델의 약점은, 때때로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종교적인 우월감에 젖어 있는 이들이나 전통적인 교리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취하는 관점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위로보다는 더 큰 상처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계획 모델(plan model)
앞의 징계 모델로 설명되지 않는 무죄한 것처럼 보이는 고난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됩니다. 현재 고난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감추어져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지만,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고난 속에 숨어 있으며,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궁극적인 선한 계획을 향하여 신자들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 궁극적 선이 실현됨으로써 결국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도 밝혀질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교육 모델(pedagogy model)
현재의 고난을 신자를 연단하고 훈련하기 위한 필연적인 도구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이 모델은 고난이 없으면 삶의 선함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파보아야 건강의 중요성을 알 수 있듯이 고난은 삶의 심층적인 깊이와 그 풍부한 의미를 이해하게 만드는 도구적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델에서도 한계가 발견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고난의 현장 그 속에서 임재하시고 내재하신다는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다만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단이나 훈련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어린아이들의 고난이나 의인의 고난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함께 고난 겪는 하나님 모델(God’s compassion model)
앞의 세 모델보다는 하나님은 고난의 현장에 신비롭게 임재하시는 분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을 위로하며 치유하고 회복시킨다는 하나님의 내재성이 크게 강조되지요.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고난의 원인을 죄만으로 연결할 수 없는 한계점을 인정하면서 악과 고난의 신비한 측면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세상의 악과 고난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겠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과 고난에 의한 어두움의 깊은 잔재들이 남아 있으며 하나님의 전능함과 인간의 죄악, 악의 실존, 그리고 재앙으로 고통당하는 고난의 인과관계를 명쾌하고도 선명하게 전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신비적 합일 모델(mystical communion model)
고난 겪는 하나님 모델과 비슷하지만, 결이 조금 다른 해석으로 고난은 하나님과의 신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강조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고난을 즐기는 분은 아니지만 고난의 신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합일을 구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십자가 사건에서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경험하지요. 루터에게 고난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자인 셈입니다.

대속적 고난 모델(vicarious suffering model)
죄의 결과는 고난이라는 인과 응보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죄가 없음에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속하기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자기 백성의 큰 범죄를 속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대속자의 역할을 맡으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이 모델의 신학적인 완성의 형태는 이사야서에 있는 고난 당하는 종의 개념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납니다.

종말론적 전망모델(eschatological perspective model)
거대한 자연재해 현상은 비록 외견상 성경에서 옛 질서의 붕괴와 결부된 묵시록적인 사건과 동일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동시에 여전히 고난 당하는 자의 현실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여기서 종말은 미래적 사건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실현된 종말로 초월적 미래 역사보다는 역사적 현재에 관심이 강조됩니다.


구원은 단순히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아직 인간의 세계는 십자가의 현실이 남아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답변은 종말이 될 때 즉 역사가 완성되는 날에 얻을 수 있으며 우리는 고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을 통해 고난 당하는 이들과 연대해 종말론적 희망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모델은 고난의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입니다. 어떤가요? 그럴듯한가요? 하지만 고난과 그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현재 상황에 대한 사려 깊은 연구나 숙고 없이 이상의 모델들을 기계적으로 혹은 단순 논리의 차원으로 적용할 경우에는 전혀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고 오히려 부정적인 비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난에 대하여 이성적인 해명이나 논증을 들이대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통당하는 당사자에게는 전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4-5)고 하시면서 대형참사가 발생했을 때 그 사건 당사자의 도덕적인 악의 존재 여부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고와 회개의 관점에서 대형참사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실로암에서의 재해를 ‘그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너희에 대한 경고’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고 회개하여 다시는 그러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대비하여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사례는 오늘날 섣불리 대재앙과 고난의 문제를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인 악과 연결하려는 시도에 강력한 경종을 울립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 광야를 지나며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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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