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빈곤, 그리고 소외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소외의 문제는 왜 우리 이웃의 빈곤과 그로 인한 고통이 더 이상 우리에게 풍요의 상징처럼 익숙해진 경제 수치와 지표를 통해 이해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고도화되는 자본주의 구조 아래 개인과 집단의 사회적 고립 문제는 심화하는 불평등과 양극화 속에서 산업 선진화를 경험하는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사회 현상으로 고착되고 있다.
이 양극화의 고통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불평등의 기원이 누구나 저마다의 능력대로 일할 수 있는 교육과 노동환경이 제공되지 못하고, 그 결과를 공평히 나눌 수 없다는 한계에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각기 다른 개인의 상황과 삶의 배경이 무시된 채 소유와 능력을 등치 시키고 있는 사회적 인식은 ‘가진 것은 능력 있는 것’이고 ‘갖지 못한 것은 능력 없는 것’이라는 그릇된 이분법적 관념을 형성시키면서 삶의 가치를 더욱 혼돈 속에 밀어 넣고 있다.
이 왜곡된 관념이 우리 한국 사회에 더욱 깊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 걸었던 치열한 산업화의 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국 식민주의를 경험한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산업 선진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룩한 국가는 대한민국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고 한다.
그 격렬했던 시간을 지나 만들어진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성과는 그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유지되며 언제나 결과론적으로 또는 적극적인 이분법적으로 이해되곤 했다.
과정은 때때로 무시되어도 좋은 선택의 영역으로 물러나고 결과적 성취가 모든 과정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힘을 얻게 된 상황 속에서 개인의 소유와 능력에 대한 동질화는 다른 어느 나라 보다 강해져 우리 사회의 빈곤과 가난의 이해를 크게 왜곡시켜 놓고 말았다.
바로 소유가 곧 능력이라는 거짓의 탈을 쓴 채 한국 현대 자본주의의 최대 덕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왜곡된 인식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가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그릇된 인식의 환경 가운데 소유의 문제는 경제적 가난과 빈곤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유의 양적 변화가 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을 때 가난은 경제적 측면을 넘어 사회적으로 한 개인이 가져야 하는 존중과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남기고 만다. 이 왜곡된 능력주의(Meritocracy)의 이면에 잠들어 버린 사회의 균형과 깨져버린 공동체의 연대는 이제 가속화된 불평등 사회에서 힘을 잃고 말았다.
노동 가치, 자본 가치
왜곡된 능력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이끌고 있는 다른 한 축은 자본 가치 상승에서 비롯한 여러 부가적인 문제들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금융시장이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자본 소득 상승은 이제 인류 전체가 노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소득 보다 그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2013년에 출간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에서 잘 그려지고 있는데 피케티는 그의 경제학 이론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에 잠식당하고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이제 더 이상 세상의 부는 개인의 노동으로 충족되기보다는 자본이 집중되는 자산소득의 증가에 의지하게 된다는 그의 주장은 2020년 이후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삶을 통해 체감적으로 잘 증명되고 있다.
피케티의 주장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2021년 대한민국의 자산 분포는 현대 한국 사회의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개인의 소득을 기준으로 오분위로 나누었을 때 그 중 상위 20%의 평균 자산은 12억 3천만원인 데 반해 하위 20%는 단지 490만 원이 전부이며, 이 격차는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더욱 커지고 있다는 통계는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을 뛰어넘어 버린 이 시대에 더 이상 노동만으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우리 이웃의 절망을 대변한다.
자산을 보유하지 못한 계층은 이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소외 계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이론은 통계 수치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자본주의의 속살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바닥을 친 이자율을 이용한 자산가들의 적극적인 자본 투기행위가 경제적 양극화를 극심하게 악화시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노동을 통한 소득으로 미래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고 느낀 청년들은 주식과 비트코인 같은 자산시장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총성 없는 전쟁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아주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많고 적은 빚을 남기며 그 시장에서 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들의 패배를 어느 명분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위로할 수 있는 아픔이기는 한 것인가? 언론은 그저 그들을 영끌족(영혼을 끌어 모은 투기 층) 이라 쉽게 지칭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족(族)이라 칭하며 집단화 시켜버린 그들 하나하나의 생명이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과 삶의 무게는 우리 시대가 함께 짊어지기에도 어쩌면 벅찬 무게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난이 두려운 것은 누군가 벗어나려 힘쓰고 있는 현실과 이상으로 꿈꾸는 지향점의 미래 모두가 스스로 소속 사회로부터 배제되지 않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 소유를 위해 투쟁하고 그것이 능력임이 용인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 사회가 함께 걷는 길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렇기에 우리 사회의 가난은 가진 것을 나누는 자선의 행위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 시대의 가난은 우리가 서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능력이 곧 공정이라는 거짓된 탈을 벗고 나서야 비로소 그 치유의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현대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낳은 빈곤은 나라님이 구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회를 함께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과 연대를 통해 서로와 관계하며 비로소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우리가 서로의 모습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고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확인되는 그 시간 우리의 가난은, 우리 사회의 빈곤은 그 종말의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