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기 키위가 엄마 키위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날고 싶어요.” 그러자 엄마 키위가 대답했습니다. “안돼, 넌 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날개가 없거든!” 아기 키위는 몹시 슬펐지만, 날고 싶은 꿈을 접기로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날개가 없어서 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은 부모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깊은 정서적 교류를 나눕니다. 시대가 변하고 맞벌이를 하는 부모가 많아져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돌보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주 양육자는 부모입니다.
이렇듯 부모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일상을 공유하며 애착을 형성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부모의 말 한마디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 100년이나 걸려 알게 되었던 정보들을 우리는 이제 손안에서 가뿐히 몇 분, 몇 초 만에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도 여전히 어려운 것은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수준만큼 배우는 사람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육의 질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니까요.
교회에서는 영적 지도자나 교회학교 교사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정에서는 부모가 바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육(敎育)이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敎)는 사귈 효(爻)와 아들 자(子), 그리고 회초리 복(攵)이 합쳐진 글자로 스승과 어린아이가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회초리로 지도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또한, 육(育)은 아들 자(子)를 뒤집은 태아의 모습과 고기 육 자와 같은 부수 형태의 달 월(肉=月)이 합쳐져서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성장과 개발을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교육은 강제적이거나 비강제적인 그리고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모든 요소가 잘 조화되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일어나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 학교와 학원 공부로 잔뜩 지쳐 돌아와 또다시 책상 앞에 앉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해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부모이든 나의 자녀가 세상의 흐름을 잘 따라가 주기를, 이왕이면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버거워하는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위로보다는 채찍질하는 말이 먼저 나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자녀들의 학교생활까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 몫의 대부분은 학교와 교사와 아이 자신에게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오롯이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공간인 가정에서의 시간은 부모님이 좋은 교사가 되어줄 기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기회들을 잘 활용하고 있을까요?
이제 잠시 부모들께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오늘 자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셨나요? 대화를 통해 소통은 잘하셨나요? 그리고 그 대화 가운데 예수님은 계셨나요?
기독교인으로서 성공적인 삶과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적 가치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녀들에게 영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삶의 가치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사기 2장 10절에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기적으로 여호수아가 죽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죽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 시기가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짧으면 한두 세대, 길면 두서너 세대를 건너뛰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의 시간적 간격을 생각해 보면 결코 오래전 살았던 세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쉽게 ‘다른 세대’가 되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이미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리 칭송받는 사람이 되더라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다 잃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기독교적 정체감을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효과적인 교육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 안에서의 자녀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기독교 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모색해 온 신학자이자 종교교육학자인 토마스 그룸(Thomas H. Groome) 교수는 “신앙 교육은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고민하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결 방법을 찾도록 돕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종교 지도자나 교사, 부모가 신앙교육을 도울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정서적으로 가장 많이 교감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제대로 된 신앙을 심어주어야 올바른 신앙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부터 실천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널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해 주거나,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신앙생활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님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녀의 신앙도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담은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삶의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되도록 부모가 본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소소하다고 여겨질지라도 신앙적으로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가면 우리 아이들도 부모를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아기 키위가 엄마 키위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날고 싶어요.” 그러자 엄마 키위가 대답했습니다. “우와, 멋진데! 그럼 우리 한번 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하나님께 여쭤보고 함께 고민해 보자!”
아기 키위는 몹시 기뻤습니다. 자신도 다른 친구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