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맨얼굴의 세상을 염원하며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다. 2020년 2월 초, 출국 1주일 전부터 우한 폐렴(코로나19)이 중국에서 발발하여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오래전에 잡아 놓았던 일정을 변경할 수 없어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지난해 11월부터 한국행 직항이 생긴 뉴질랜드 항공편은 자리도 여유가 있었고 마스크를 쓴 사람도 거의 없어 의외로 편안한 마음으로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밟기 위하여 걷다 보니 어느 사이에 주변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여권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여행객들도 여권검사를 하는 공항 직원들도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마스크를 써야 했다.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공항버스를 타고 딸네 집으로 가면서 내 눈에 들어오는 가장 두드러진 서울 풍경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였다.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도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결코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님재는 자객입니까요?’
나는 고개를 돌려 달리는 버스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차츰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고개를 쳐들던 그리움과 반가움 대신 공연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어둠과 함께 내게 몰려왔다. 그런 느낌을 애써 누르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님재는 자객입니까요?’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님재는 자객입니까요?’는 분명 이상의 소설 ‘동해(童骸)’에서 과일을 깎으려고 과도를 꺼내는 여자에게 주인공이 객쩍게 묻는 말이었다. 왜 그때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 말이 떠올랐는지를 생각하다 나는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는 마스크를 쓴 모든 사람에게 ‘님재는 자객입니까요?’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소설 ‘동해(童骸)’의 주인공처럼 아니 기인(奇人) 이상(李箱)처럼 객쩍은 질문을 던지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바탕 웃었으면 차라리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도 없었기에 혼자서 ‘님재는 자객입니까요?’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 사는지가 벌써 삼십 년이 가까웠다. 그 삼십 년 동안 거의 매년 한 번씩은 오는 고국이지만 밖에서 사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고국의 모습은 항시 놀라웠다. 곧고 넓게 벋은 도로와 그 도로를 뒤덮고 달리는 고급 차들, 도로 양쪽에 하늘이 낮다고 계속 치솟는 고층빌딩들, 그리고 밤하늘을 현란하게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네온사인은 발전하는 고국의 모습이었다.

불과 70여 년 전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세계 최빈국의 황무지에서 우리의 피와 땀으로 한강 변의 기적을 일구어 낸 고국의 놀라운 변신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도록 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고국을 찾는 나를 맞는 것은 발전하는 고국의 모습보다는 변해가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잘살게 되었으면 그만큼 사람들의 모습에도 여유가 있고 서로를 배려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있어야 했건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집이 가난할 때엔 부모자식이 힘을 합쳐 집안을 일으키다가 어느 정도 잘살게 되면 가족 사이에 불화가 생기듯 어느덧 사회 곳곳에 갈등이 불거져 나오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갈라지고 있었다. 잘못된 정치에서 비롯된 지역 갈등, 불공평한 경제로 비롯된 빈부(貧富) 갈등에 이어 해묵은 이념 갈등이 사람들을 갈라놓더니 어느 사이에 남(男)과 여(女)가 갈라지고 노(老)와 소(少)가 갈라졌다.

사람들 얼굴 위에 내려앉은 무표정의 마스크
갈등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얼굴엔 표정이 사라지고 무표정이 얼굴을 감쌌다. 공부에 지친 어린 학생들의 얼굴에서부터 경쟁에 지친 직장인들의 얼굴을 거쳐 나이 들어 사회의 뒷전으로 물러선 노인들의 얼굴까지 모두 무표정이었다.

나 이외의 모든 타인이 어느 편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표정이 무표정이었기에 사람들 모두가 무표정이 된 것이었다. 무표정은 사실 사람들 스스로도 모르게 그들 얼굴 위에 덧씌워진 인공의 마스크였다. 사람들은 자기 얼굴 위에 내려앉은 무표정이란 마스크를 느끼지도 못한 채 쓰고 다녔다.

이 무표정의 얼굴이 서로에게 익숙해질 무렵 중국발 황사(黃沙)가 봄이 되면 전국을 뒤덮었다. 경제적 여유와 더불어 건강이 우상이 된 오늘의 사람들은 황사를 맨얼굴로 참아낼 수 없었다. 너도나도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얼굴은 마스크 뒤로 사라져버렸다.

황사와 마스크가 생활의 일부로 정착되고 있을 때 미세 먼지가 다가왔고 이어서 초미세(超微細) 먼지가 다가왔다. 마스크는 차츰 더 촘촘해졌고 점점 더 커졌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대중교통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누가 누구인지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밀착된 마스크 뒤의 완전한 타인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서로 눈이 마주치면 마스크 뒤에서이지만 눈인사도 하고 아는 체도 하였다.

우한 폐렴, 일명 코로나19
2020년 새해가 왔다. 해가 바뀌었기에 사람들은 무언가 막연한 변화를 기대하며 칙칙한 겨울 날씨를 견뎌 나갔다. 하지만 겨울 미세먼지와 더불어 사람들을 덮친 것은 중국발 전염병이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우한 폐렴, 일명 코로나19는 무서운 기세로 세계로 퍼져 나갔다.

21세기가 되어 발발하는 전염병은 대개가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변종이어서 치료 약이 없다. 치사율도 높은데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교류도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극도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몹쓸 병으로 인해 마스크는 필수품을 넘어 모두에게 그 착용이 의무가 되었다.

전에는 마스크는 단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였다. 그러나 코로나19를 전염시키는 가장 커다란 매개체가 서로의 입과 코에서 튀어 나가는 미세한 포말(泡沫)이었기에 마스크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만큼 나로부터 타인을 보호해주는 장비였다.

전에는 마스크를 하고 안 하고는 개인의 선택이었지만 이제는 마스크를 하지 않고는 결코 타인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어느덧 온 도시가 온 나라가 마스크의 물결로 뒤덮였다. 게다가 전염이 두려워 서로 만나서 악수도 하지 못하고 아무리 반가워도 서로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나도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로 덮인 입과 코로 답답한 숨을 쉬며 나는 이렇게 된 모든 것이 결국 우리 모두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이웃과 친구는 모두가 경쟁자로 바뀌었다. 경쟁은 우리의 얼굴에서 표정을 빼앗아 갔고 무표정의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 같은 대기의 오염도 지나친 산업화로 인한 사람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번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전염병도 모두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스스로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은 좋아졌는지 몰라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자유를 빼앗겼고 얼굴도 빼앗겨서 모두가 마스크 뒤로 묻혀버렸다.

마스크로 뒤덮인 거리를 걷다 돌아온 어느 저녁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다음과 같은 시(詩)를 적어 보았다.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의 눈동자

전염병이 돌자 사람들은 사라졌고
거리에도 버스에도 시장에도
검은 마스크 흰 마스크만 돌아다녔다

모든 마스크 위로는 번쩍이는 눈동자
눈동자 모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었다

아무도 기침도 재채기도 하면 안 됐다
행여 실수로 잔기침이라도 했다가는
사방에서 번쩍이는 눈동자의 무차별 공격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의 눈동자
그 눈동자 앞에 사람들은 자꾸 작아져
바이러스보다 작아져 마스크 뒤로 묻혔다

검은 마스크 흰 마스크만 떠다니는 도시
마스크 아래론 흉흉한 소문이 흘러나왔고
마스크 위론 경계(警戒)의 눈동자가 번쩍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맨 얼굴의 세상을 염원하며
겨울 잿빛 하늘을 이고 뿌연 대기 속을 마스크를 쓴 사람들 속에 마스크를 쓰고 걸으며 나는 염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 이번 코로나19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를 염원한다.

이제 그만 탐욕의 마음을 버리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삶의 자세를 회복하기를 염원한다. 그리하여 그 옛날처럼 비록 주머니는 가벼워도 푸른 하늘 아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사람들끼리 만나면 반갑게 악수하고 끌어안고 무표정도 마스크도 벗어버린 아름다운 맨 얼굴을 마음껏 서로 비빌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염원한다. 2020. 2월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 한가운데서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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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