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하여.1

히브리(종교)적 인식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는 다양한 표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흔히 ‘이마고 데이’(imago Dei)라는 라틴어 구절로 표현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26~28일 듯합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를 “모든 살아있는 종류들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모든 탁월함과 완전성”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이외의 것을 창조하실 때 그냥 ‘무엇이 있으라’라 명령만을 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 천지와 만물이 ‘무에서 유’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다른 자연계의 창조물은 ‘종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십니다.

심지어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의논하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수많은 학자에 의해 이루어져 왔고, 그 이해와 해석은 인간의 본질, 존재,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죄와 은총론 등 기독교 신학에 있어 인간 이해의 핵심적 요소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하지만 처음 유대교 신학자들은 이 본문을 기독교 신학자들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적 이해는 가능한 피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기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고, 인간들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불 가시성은 접근 불가능성이며 이는 곧 그의 신성이며 지존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가시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통해 자기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연유로 아브라함에게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현현하는 한 방법인 사자(a messenger)로 나타난 것일 뿐, 하나님이 가진 본래의 모습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설령 성경의 곳곳에 하나님이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부위를 통해 묘사되어 하나님을 ‘보았다’는 기록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신약성경에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서 4:12), 또는 “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딤전 6:16)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거나 아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포함한 천재적 예술가들을 통해 무형의 하나님이 어떠한 형태로든 유형의 신으로 탈바꿈해 알려진 성화(icon)들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문화유산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인간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의 표현을 통해 하나님에게 바치는 그들 나름의 신앙고백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함으로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는가?”라는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적 철학에 충실한 신인식에 의한 종교성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형상을 만드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그 숱한 금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하고 또 실제로 보기를 원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인식해야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사랑과 은혜를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인간은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대 종교의 발상지인 인도, 그리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나타나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그러한 인간의 인식을 통한 신의 모형을 생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문명에 등장하는 신들은 가끔은 외모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렇게 왜곡하여 인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가엾은 실존적 상황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달리 어찌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존재론)적 인식
이에 반해 초기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의 도움으로 이 구절이 창조주와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말하고 인간을 피조물의 정점으로 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스인들에게도 신은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완벽하게 인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신은 충분히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고, 신의 현존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일도 가능하다 생각했습니다. 기하학과 논리적 사고에 근거한 그리스 사상과 플라톤주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종교적 계시와 초이성적 신앙 체험을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기독교 사상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즉 성경에 계시로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중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 속에 남아있는 그리스 철학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독일의 현대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는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와 로마교회 시기에 대부분 하나님의 ‘형상(쩨렘)’과 ‘모양(데무트)’은 분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형상’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그리고 ‘모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후자는 상실되었으나, 전자는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고대 교부들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육체가 아닌 이성적 영혼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이성은 사전적 똑똑함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을 뜻하는 말인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세상은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이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이성이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한 플라톤주의와 헬라철학의 이해를 바탕으로 서방 교부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적 자질보다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자질로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밀라노의 주교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는 인간의 육체는 벽만 있어도 볼 수 없고,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듣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정신은 가족이 아프리카든, 페르시아든 어디 있든지 언제나 마음으로 생각으로 그들에게 나아 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의 능력이 아닌 정신의 능력이라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혼의 불멸성, 합리적인 이성, 정신적 능력, 인간의 도덕성, 자유의지, 그리고 인격 등과 같은 인간의 내적 자질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헬라철학과 플라톤주의의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초대교회와 교부시대부터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백합니다(요 14:9; 롬 8:29; 고전 15:45-49; 고후 4:4; 골 1:15).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그리스도 자신이 되도록 창조” 되었으며 “인간이 거룩해지고 영광스럽게 되어야 하는 것”을 공통된 기본 토대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며 현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 양식에서 어떤 것을 강조할 때 동의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이 다른 짐승들처럼 그저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쩨렘’과 ‘데무트’를 반복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단어를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고 강조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완성되어야 할 운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아담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