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별(惜別)의 화요음악회

319회를 마지막으로 화요음악회는 끝이 났지만,항시 기억할 것입니다”

신서란 귀거래사(新西蘭 歸去來辭)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도 같이 전합니다”

나라에서 살 수 있었던 행운
삼십 년의 세월을 뉴질랜드에서 살았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이국땅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을 꼭 한나라에서만 살지 않고 또 다른 나라에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커다란 행운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뉴질랜드였으니 축복받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또한 축복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또한 다양한 동호회 모임에서 만나는 분들과 사귐을 나누며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이곳 생활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또한 10년 전부터 제가 주관해온 화요음악회는 회원들과 음악을 중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는 참으로 유익하고 보람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그런 바람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약 3년 전에 시작된 코로나였습니다.

2020년 1월에 아내와 같이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모처럼 연초에 갔기에 친척들도 만나고 친구들과 회포도 풀고 싶었지만 중국에서 발발하여 별안간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로 인해 쫓기듯 뉴질랜드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안 쓰던 마스크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는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고국과 뉴질랜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제 몸과 마음의 불안정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의문이 생기자 가슴이 답답해진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다가도 조국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귀국해서 힘을 합하여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국에 코로나가 퍼져 모두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도망치듯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있는 저의 모습이 너무 비겁하고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코로나가 깨우쳐 준 정체성(正體性)
‘이제는 돌아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코로나에 쫓겨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코로나 사태만 진정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코로나와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을 평생 처음 겪는 저로서는 이 사태가 그렇게 오래 계속될지는 몰랐습니다. 가장 안전할 것 같았던 뉴질랜드에도 코로나는 들어왔고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더 이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정부는 국경을 막았습니다. 아무도 들어올 수도 없었고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길어야 몇 달이면 끝이 날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는 해가 바뀌어도 진정이 안 되었고 좀 잠잠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일어나 극성을 부렸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그렇게 좋아했던 화요음악회도 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2년 반이 넘도록 계속되다가 다행히 2022년 봄부터 코로나의 세력이 약해지고 사람들의 면역력도 강해지자 정부는 국경을 열었습니다. 하늘길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우리 부부는 곧장 고국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마음껏 고국산천을 누볐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고국의 하늘과 땅은 우리 부부를 반겨주었고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들과 친구들은 넉넉한 가슴과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이번에 가면 정리합시다.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된 거 같소.” 두 달 동안의 고국 방문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저도 이번 여행을 통해서 고국이 얼마나 좋은지를 실감했어요. 제 몸에 맞는 옷같이 편안하고 자유스러워요. 우리가 이제 무얼 더 바라겠어요. 돌아가서 맘 편하고 자유롭게 여생을 살면 되지요.”

평소에 말을 아끼던 아내가 웬일인지 마치 준비해놓았던 것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생각나게 하는 아내의 대답에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

거의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같이 살며 우리 부부는 호사스럽게 살지는 못 했어도 자유롭게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무엇인가를 크게 바라지도 않았기에 두려움 없이 훌훌 고국을 떠날 수도 있었고 낯선 곳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옛 둥지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삼십 년 전 그렇게 담담하게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다시 담담하게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은 삶을 고국에서 산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두려울 것도 전혀 없습니다. 머물고 떠나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부부야말로 ‘우리는 자유다’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 돌아가서 자유롭게 또 새로운 삶을 삽시다.”라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삼십 년 뉴질랜드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화요음악회 여러분을 비롯한 뉴질랜드에서 만났던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씀과 더불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도 같이 전합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며 그 옛날 도연명(陶淵明)의 흉내를 내어 시(詩) 한 편 읊조리며 돌아가려 합니다.

신서란 귀거래사(新西蘭 歸去來辭)
돌아가야 해, 몸도 마음도 늙었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지난날이 아무리 아름다웠어도 모두 젊은 날의 한 자락 꿈
봄날의 아지랑이마냥 꿈은 사라져가고 이제는 외로움이 꿈보다 앞서는 나이
돌아가야 해, 어릴 적 내 친구들 기다리는 곳으로

잘 있어라 아오테아로아 길고 흰 구름의 나라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아이들은 성장하였고 우린 곱게 나이 들었다
지난 긴 세월 네게 진 신세 잊지 않으마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 가득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해, 부디 기쁜 마음으로 보내다오

언젠가부터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어
나중에야 알았어 고국이 날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욕심도 버리고 마음도 내려놓으니 비로소 들렸어 고국이 날 부르는 소리
돌아가야 해, 나는 고국을 잊었어도 고국은 날 잊지 않았어

고국은 어머니 같을 거야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밥때를 놓치고 들어가도
따뜻한 아랫목에 밥그릇 묻어놓고 기다리시던 어머니 같을 거야
이제 뒤늦게 돌아가지만 고국은 어머니같이 받아줄 거야
그 따뜻한 미소로 돌아가야 해, 가서 그 아늑하고 따듯한 품에 안길 거야

지난 삼십 년 머나먼 길을 꿈꾸듯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왔어
이젠 돌아가 땅만 보며 살 거야 땅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 거야
맨발로 땅을 밟으며 맨손으로 땅을 만지며 살고파
돌아가야 해, 그 속에서 살다가 언젠간 나도 고국의 땅이 되고 파

2023년 2월 석운 씀

남은 삶의 기한 감사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제 여러분 곁 떠나

제가 뉴질랜드로 이주해서 살기 시작한 지 어언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곳 교민 대부분이 그러셨듯 저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지상에 남은 마지막 낙원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환경과 생활 조건이 좋은 뉴질랜드이지만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시시때때로 가슴속을 밀고 들어오는 외로움입니다. 그 외로움에 못 이겨 가슴앓이를 하며 방황하는 이웃들을 볼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교회 분들과 같이 저희 집에서 음악을 들었는데 모두 좋아하시며 이런 기회가 가끔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의외로 기뻐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와 아내는 매주 하루 음악 모임을 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모여서 정담도 나누고 음악도 듣고 하나님 말씀도 나누다 보면 외로움도 잊을 수 있으니 일석다조(一石多鳥)의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제게는 학창 시절부터 모아 온 레코드판과 CD들이 많이 있었고 괜찮은 오디오 기기들도 웬만큼 갖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음악회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몇몇 분들께 전화를 걸어 취지를 말씀드리고 어느 요일이 제일 좋을까 의논하였더니 모두 화요일이 좋다고 해서 그다음 주 화요일(2012년 3월 6일)에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첫 모임에는 교우(敎友) 중심으로 모였지만 한두 달이 지나며 입소문이 나자 참석하고 싶다는 분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분도 많지만 ‘좋은 모임’에 목말라하는 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저와 아내는 음악회에 오기 원하는 모든 교민께 집 문을 활짝 열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음악회에 참석할 수 있느냐고 전화로 문의하는 모든 분께 “귀만 갖고 오시면 됩니다. 다만 음악 감상 뒤에는 잠깐 같이 성경 구절을 보는 순서가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는 분들은 점점 많아졌고 매주 화요일에 모이다 보니 음악회 이름이 저절로 ‘화요음악회’가 되었습니다.

정이정(淨耳亭)으로 승격한 우리 집 창고
사람이나 사물이나 그 쓰임 받음에 따라 격이 달라지고 운명이 달라집니다. 우리 집 1층은 한가운데가 주차장이고 양쪽에는 창고가 있었는데 직사각형의 양쪽 창고가 꽤 넓었습니다. 그중 왼쪽 창고를 조금 손봐서 음악실을 만들었습니다. 천정이 조금 낮은 것이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열댓 명이 음악을 듣기에는 손색이 없었습니다.

화요음악회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분이 모여 음악을 듣는 곳인데 그럴듯한 이름 하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음악평론가 박용구(朴容九) 선생님께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때가 2016년 6월이었습니다. 102세까지 장수하신 선생께서는 만년에 여유가 생기자 댁에 음악실을 마련하고 그 이름을 세이정(洗耳亭)이라 지으셨다 했습니다.

선생님의 음악실 이름을 본떠서 지은 우리 음악실의 이름이 정이정(淨耳亭)입니다. 화요음악회에 와서 음악을 들으며 마음과 귀를 깨끗하게 하면 우리도 모두 박용구 선생님처럼 102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덕담과 더불어 생겨난 이름입니다.

십 년이 넘게 계속된 화요음악회

이렇게 시작한 화요음악회가 많은 분의 사랑과 성원에 힘입어 어언 십 년이 넘게 계속되었고 횟수로는 300회가 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오클랜드에 있는 한 우리 집은 언제나 화요일 저녁에 여러분에게 열려있을 것입니다.”라고 이곳 교민 모두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우리부부는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때때로 여행을 하느라고 일 년에 한참씩은 집을 비워야 했지만 그 외에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항상 음악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동안 정이정에서는 많은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던 분끼리 음악을 통해서 만나 마음을 열고 십년지기(十年知己)가 되고 어떤 분들은 자식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돈이 되기도 했습니다. 외국에서 살면서 제일 어려운 문제의 하나가 자녀의 결혼입니다. 선택의 폭이 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음악을 좋아하는 가정끼리 만나 아들딸을 결혼시켰으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어떤 분들은 음악 감상 끝에 매번 듣게 되는 하나님 말씀이 너무 좋아 부부가 같이 교회에 나가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겨 날 때마다 생각나는 말씀은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전서 3:6)’이었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저와 아내는 오직 ‘심고 물 주는’ 청지기의 마음으로 화요일 저녁이 되면 정이정을 활짝 열고 다과와 음악을 준비하며 화요음악회를 찾는 귀한 손님을 맞았습니다. 마음 맞는 몇 분을 중심으로 시작한 작은 음악 모임이 오랜 세월 지속되며 자연히 교민 사회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교민 신문들이 다투어 몇 차례씩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뉴질랜드 유일의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천라이프(Christianlife)’에서는 지면을 할애하여 화요음악회 이야기를 싣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고마운 요청에 부응하여 지난 4년 동안 크리스천라이프에 ‘석운의 화요음악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였습니다. 작년에는 그 칼럼들과 지난 십 년 동안 화요음악회에 있었던 이야기를 모아 ‘화요일의 클래식’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석별의 인사를 나눌 때

처음에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듣기 위해 그리고 따뜻한 모임의 분위기가 좋아 찾아오는 여러분의 성원 덕분에 50회, 100회, 200회가 지났을 때는 회원들 스스로가 놀라기도 하고 또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20년 정초에 발발한 코로나로 인해 음악회는 중단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모였고 그런 와중에도 2021년 4월 17일에는 드디어 대망의 300회 음악회를 열었지만 그 뒤로 다시 극성을 부리는 코로나로 인해 음악회를 열 수 없었습니다.

이제 코로나가 진정되어서 다시 음악회를 열어도 좋은 때가 되었지만 우리 부부의 개인 사정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음악회를 열 수가 없게 되어 너무도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었는지 고국 생각도 간절하고 또 우리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 삼십 년 정들었던 뉴질랜드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319회를 마지막으로 화요음악회는 끝이 났지만 저도 여러분도 결코 이 아름다웠던 모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국에 가서도 화요일 저녁이면 정이정(淨耳亭)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음악을 듣던 여러분을 항시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라는 전도서 3장의 말씀으로 이 글을 맺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화요음악회 여러분, 화요음악회에 주어진 기한은 여기까지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의 남은 삶에도 기한이 있습니다. 그 기한을 감사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제 저는 여러분 곁을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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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