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만 중세 가톨릭은 “믿음 외에 선행을 쌓아야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가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끊임없이 선한 공로를 쌓기 위해 몰두합니다. 먼지 한 톨만 한 죄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채찍으로 자신을 치며 고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좌절합니다. 그러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마침내 진리를 깨닫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어떤 선한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진리, 그 누구라도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루터는 죄를 씻기 위해 선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됩니다. 나아가 성도를 현혹하여 헌금으로 공로를 쌓게 하고 면죄부를 주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가를 고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부패한 가톨릭에 맞선 종교개혁가인 루터, 쯔빙글리, 깔뱅의 신학 위에 세워진 새로운 교회, 즉 reformed Church 개혁교회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개혁교회라는 긍지만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진심으로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순전한 교회를 위하여 불굴의 믿음으로 순교도 불사한 선배들의 개혁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개혁은 멈춤 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가톨릭을 개혁한 교회라는 의미에서 reformed church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Reforming Church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개혁해야 할까요?
첫째, 형식적인 예배 자세를 개혁해야 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서 “무수한 재물, 숫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나, 어린양 숫염소의 피”는 구약시대의 제사 때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는 것이 기쁘지 않다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헌금, 헌물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13절 전반 절에서 아예 이렇게 말씀합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쓸데없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께 드리는 제물을 싫어하실까요?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온갖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기에 아무리 많은 제물 헌금을 드려도 싫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위선적인 모습을 개혁해야 합니다
13절 전반절 이후와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구약시대에는 월삭, 곧 매월 초하루, 안식일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장막절 같은 정한 절기에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정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시고, 이것이 무거운 짐이요 그런 역겨운 예배를 받는 것도 지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손을 들고 많이 기도해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손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은혜가 있었겠으며, 하나님의 어떤 응답이 있었겠습니까? 심령이 살아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겠습니까? 영혼이 소생하여 기뻐 뛰는 역사가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로 개혁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첫째, 회개하라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자발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악한 행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형식적인 예배의 모습, 손에 악이 가득하면서 거룩한 척 기도하는 위선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겸손히 용서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간 세리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겸손히 구할 때의 자세로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반드시 매일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회개하는 자는 흰 눈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
둘째, 정의의 길을 가라
17절을 보겠습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악을 버리는 회개를 넘어, 적극적으로 선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리고 배워야 할 선의 주제는 정의입니다. 즉, 학대받는 자, 고아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홀로 된 미망인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삶에 거리낄 것이 없는 거룩함뿐만 아니라 연약한 이웃을 품어주는 정의의 길을 갈 때 믿음의 고백과 삶이 일치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의의 길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