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역 선교 역사

1954년~1960년, 북한 기독교 지하교회, 지하교인 형성 시기
북한은 한국전쟁 패배로 인하여 전쟁이 끝난 후 바로 북한에 있는 반 김일성 세력인 북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 숙청하는 것에 우선하였다. 북한은 1955년 4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계급교양을 강하하라고 지시하였다. 계급교양이란 유신론을 철저히 파괴하고 무신론에 입각한 사상교육을 인민들에게 시키라는 것이다.

직장, 사회단체, 부락별로 회의를 하고 월남자 가족을 중심으로 자아비판을 강요하였다. 인민의 압력으로 기독교나 자유의사를 자백케 하는 대중 고문이 계급교양이다. 이 시기에 순교를 한 기독교인들을 약 5,000여 명 추산하고 있다.

북한은 1958년 중앙당 집중 지도를 시행하여 북한 지하교회와 지하교인들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표적인 예로 이만화목사 사건이다. 이만화목사는 평북 용천군내 10여 개 협동농장에 기독교 비밀조직을 형성하고 2,000명이 넘는 신도가 조직되었다.

비밀 지하교회는 공산주의자들도 눈치채지 못하게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이만화목사는 농장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성경이야기를 하고 머리 숙임 없이 기도를 드렸다. 평북 용천지역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일제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지역이다. 어떤 부락에는 인민위원 공산당 간부까지 지하교회에 가담하였다.

북한은 사회안전원 300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명을 용천군에 급습시켜 일제히 검색을 하였다. 그중 두 신도의 가정이 예배를 보고 있었고 그 현장에서 발각되어 처참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만화목사가 자진 출두하여 지하교회 책임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20여 명의 신도와 순교하였다. 북한 공산주의 집단들은 이만화목사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 말살 정책을 본격적으로 감행하였으며 지하 기독교인들은 더 지하로 숨어야 했다.

북한사회에서의 반기독교적 사회풍조는 이 시기에 북한에서 크게 강조된 사상 의식의 개조작업의 일환인 반종교 선전으로 이어졌다. 1959년 반종교 선전을 위한 소책자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1959년 노동당 출판사에서 펴낸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는 출판물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시 북한사회에 흐르고 있던 기류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1960년~1970년, 북한 지하교인들의 고난 시대
1950년 후반이 되면서 북한 사회에서 교회에 가고 또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사라진 것 같지만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교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극히 부분적이나마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꾸준히 노력할 대신에 신이나 하나님의 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신의 생활에서까지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는 인민들이 있다” 고 북한 당국이 인민들에게 경고했다.

이런 신도들을 통해서 1960년대까지 북한 교회의 명백히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공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이미 1960년대 초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다. 이 시기에 기독교 의식이 발견되면 모조리 체포하고 기독교 서적이 발견되면 불온문서로 간주하여 직접 연행하는 등 탄압하였다. 그 결과 표면상 북한지역에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과 교회가 없는 문자 그대로 신앙의 불모지대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지하교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북한에서는 엄한 통제의 분위기 속에서도 소규모 기독교인에 대한 저항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에 지하교회, 지하교인이 형성되는 시기로 이 기간 동안 3,000명 이상의 북한 기독교인들이 순교하였고 기독교 신앙인들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이다.

1970년~1980년,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의 순교 시대
이 시기에는 북한 공산당은 기독교를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처형을 하고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평안남북도에 밀집되어 있던 교회 시설들을 몰수하여 회의장, 유치원, 선전장 등으로 용도 변경을 했고 교회는 단 한 개도 남기지 않았다. 이 시대를 북한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북한은 잔존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사회적으로 격리시켜 관리했다.

북한은 소위 주민등록사업에 의해서 51개 층으로 분류하여 기독교인 42, 천주교인 44 코드 번호를 부여하여 일반 감시 및 특별 감시 대상으로 구분하였다. 이 시기는 남아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의 시기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기독교의 변화의 시대였다. 변화란 교회조직과 시설, 성직자 부재 상황에 적응하면서 북한사회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와 신앙생활을 모색, 실천하는 과정을 말한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는 비공개적인 가정교회와 개인이 혼자 믿거나 가족이 믿는 지하교인으로 나타났고 친 사회주의적 신앙유형인 기독교 연맹이라는 공적인 제도하에서 소수의 교회지도자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가시화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순교 및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된 사람은 약 2,0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980년~1990년, 북한 지하교인들의 시대
이 시기는 북한 기독교 지하교회는 대부분 북한 공산당에 색출이 되어 지하교회는 대부분 없어지고 1953년 이전에 기독교 믿음을 가진 지하교인으로 믿음을 전승한 시기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고령화로 자식들에게조차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을 못하고 일부는 훼손된 몇 장의 성경 말씀으로 혹은 십자가 목걸이를 차용하면서 기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순교 및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된 사람은 약 2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북한 공산당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연맹의 기본 조직 단위로 가정교회가 다른 나라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함으로써 가정교회의 구성과 예배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용 교회인 가정교회는 1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배는 1930년 중반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사용한 시편 찬송가를 사용했다. 북한 공산당 교회는 1983년~1984년에 성경 및 찬송가를 간행했다.

이 시기에 북한 공산당이 밝힌 북한 기독교인은 5천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500개의 예배처소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북한 공산당이 선전하는 가짜 기독교인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기독교가 하나의 대외적인 선전도구로 이용 가치가 있을 때에는 그 존재를 강조하지만 대내적으로 형법 및 조선 노동당 규약 등의 규범으로 주민들을 기독교와 격리시키고 기독교에 대체하여 새로운 종교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주입시키고 있다.

북한에 봉수교회, 칠골교회를 건축하고 1989년부터 종교행사를 개최하여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의 기독교 활동은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이용하고 기독교가 노동당 외곽단체로서 포교활동 보다는 대내외적인 성명서 채택. 국제적인 종교 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한 정치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1990년~2000년, 중국개방으로 북한지역에 선교 및 지하교인들 순교자의 시대
이 시기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지역을 통하여 북한에 지하교인과 북한지역에 선교를 통하여 북한 복음화를 위한 선교 비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초반에 중국 동북 삼성을 통하여 한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중국 조선족 전도자들이 북한지역으로 들어가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면서 북한 내 기독교가 새로이 전파되었다.

1998년 이후 북한 고난의 시대에 십여 만 명의 많은 북한 사람들이 중국, 러시아 등지로 탈북하였고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기독교 신앙지도를 하면서 북한교회의 재건의 사역자로 세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북한 지하교인 수는 몇 배 늘어났고 순교자들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최소한 300여 명 이상이 순교와 정치범 수용소로에 갇히게 되었다.

함경북도. 자강도, 평양북도 중국 접경지역에 많은 선교센터가 유입되면서 북한에 지하교회와 지하교인의 조직화가 형성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북한 기독교 전파는 주로 중국 조선족을 통해서 북한에서 중국으로 임시로 건너온 북한사람들에 의해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북한 공산당은 이 시기에 기독교 교인들을 체포하여 간첩죄로 몰아서 공개처형을 하였으며 보위부에서 조사한 이후 바로 처형을 하거나 가족이나 접촉자 모두를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2000년~2020년대 현재, 북한 기독교가 그리스도와 고난을 받는 시대
북한 지하교인은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북한 내에 복음을 전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200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가족 10여 명이 국가 반역죄로 총살당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성경을 보급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이다.

2005년 기독교 라디오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남포시 주민 102명이 한꺼번에 적발되어 40명은 총살되었고, 62명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15 관리소로 보내졌다.

북한 지하교인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중국에서 기독교 신앙지도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 접경지역에서 성경 교육을 받은 뒤 성경책, 찬송가, 엠피스리(성경 찬송), 라디오, 기독교 CD, USB를 공급받아서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들은 신앙생활이 발각될 경우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을 당하게 된다.

중국 북한 접경지대는 지금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총, 칼 대신 성경과 식량을 들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북한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 현재 북한의 주적은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기독교이다.

북한 내 지하교인들은 성경적 이해가 부족하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에 대해서 알고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시기에 최소한 500여 명 이상이 순교와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오픈도어 선교회가 2017년에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 순위(World Watch List, 이하 WWL)’에 따르면 여전히 북한이 기독교 박해 국가 순위 1위의 불명예를 차지했다. 이는 15년째 북한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북한 공산주의 독재정권의 종교 탄압이 여전함을 드러냈다.

한국 오픈도어 선교회는 “평양의 독재정권이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적대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신자들은 완전히 지하에 갇혀 있으며, 대부분 연결이 끊어져서 서로의 신앙을 숨겨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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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파라카이 예수사랑교회 다민족 선교 담임목사. 총신대신대원 졸업. 한의사로서 남태평양과 뉴질랜드 지역에 의료 선교 사역을 하고, 미국 그레이스신대원 문화교류학박사 논문인‘북한선교를 위한 접촉점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연구’를 쉽게 풀어 2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