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의 교향곡, ‘낭만주의 교향곡의 종착지’

작년 부활절 때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들었습니다. 그때 설명해 드렸듯이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빈에서 활동하며 모두 10개의 교향곡(대지의 노래 포함)을 작곡한 한 그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교향곡 작곡가입니다. 다른 어떤 음악보다도 교향곡 작곡에 전념했던 말러는 교향곡을 작곡할 때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마음 자세로 임했다고 합니다.

20대 중반에 첫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51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가 작곡한 교향곡들을 가리켜 많은 사람이 ‘낭만주의 교향곡의 종착지’라고도 부릅니다. 베토벤 이후 순수음악을 지향했던 교향곡과 표제적인 성향의 교향곡이 표류하다가 말러의 교향곡에 의해 종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교향곡엔 표제적이면서도 순수음악적인 양식이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유의 형식과 기법으로 나타나 있어 낭만주의 교향곡의 전통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9곡의 교향곡을 작곡하여 사실상 교향곡을 완성했다는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훨씬 확장된 규모의 음악을 시도한 그의 교향곡은 대규모의 악기 편성뿐 아니라 성악까지 도입하여 교향곡을 대형화하였기에 연주 시간도 엄청나게 깁니다.

말러의 교향곡을 처음 들으려는 분들이 듣기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어렵기도 하지만 너무 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곡가의 교향곡에 비해 긴 건 사실이지만 오늘 우리가 들으려는 1번 교향곡은 그 이름은 거인(Titan)이지만 길이는 50분 정도로 비교적 짧은 편에 속합니다. 이 정도면 견딜만하다고(?) 생각해서 화요음악회에서 모두 편한 마음으로 같이 들었습니다.

‘거인(Titan)’이라는 이름의 말러의 교향곡 1번
음악이건 그림이건 어떤 제목을 갖고 있으면 작품과 제목과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거인’이란 부제는 말러 자신이 붙였다고 합니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라는 말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장 파울(Jean Paul 필명)이 남긴 명언입니다. 당시에는 괴테만큼이나 유명했다는 이 작가의 장편 소설 ‘거인(Titan)’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기에 말러는 그의 첫 교향곡에 ‘거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말러는 28살의 청년이었지만 그때까지의 그의 삶은 이미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였지만 유년기에 그의 15명의 형제 중 8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감수성이 강했던 그는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데 대한 심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또한 지극히 방탕하면서도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의 불화로 집안 분위기는 항시 어둡고 불안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떠나고 싶었기에 그는 처음 쓰는 교향곡을 통해 ‘거인’의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꿈과 현실의 괴리(乖離) 사이에서 태어난 곡
말러의 교향곡 1번을 듣다 보면 자꾸만 소년 시절에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가 생각납니다. 소인국(小人國) 릴리퍼트(Lilliput)에서 돌아온 걸리버는 한참 동안 자기가 거인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평균 키 15cm밖에 안 되는 사람들과 생활하다 돌아와 다시 현실에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행동이 조심스럽고 부자유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했고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곡을 들으면서 특히 첫 악장이 시작되며 나오는 길고 긴 현(絃)의 A의 지속음을 들을 때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저만의 지나친 억측일까요?

문학수는 그의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말러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두 개의 대립항 속에서 함께 부대끼는 일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대립항을 ‘천국과 지옥, 죽음과 삶, 진지함과 우스개, 종교적일 만큼 숭고해 보이는 아름다움과 유행가적 통속성 고전적 형식미와 민초의 자유스러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그의 지적이 꽤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곡이 아마도 이 곡 ‘거인’일 것입니다.

실연, 고뇌, 그리고 젊음의 낭만이 어우러져 자화상이 된 곡
이 곡을 듣기 전에 말러가 작곡한 가곡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1883~1885)’를 들어보면 좋습니다. 4곡으로 된 이 가곡은 말러가 짝사랑했던 소프라노 가수 요한나 리히터에게 실연당한 아픔으로 태어난 곡입니다. 말러는 이 곡을 통해 실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 삶을 고뇌하는 젊은이의 방황하는 마음을 그려냈습니다.

이 가곡집은 1번 교향곡보다 먼저 나왔지만 그 작곡 과정에서 작곡자의 마음속에서 생성된 악상은 거의 같은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두 곡의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또한 교향곡의 첫 악장에 이 가곡의 제2곡인 ‘아침 들판을 걸으면’의 선율이 나오고 세 번째 악장의 중간부에서는 이 가곡의 제4곡 ‘두 개의 파란 눈이’의 선율이 나오는 것을 보면 두 곡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러의 제자이자 말러를 가장 잘 연주한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는 이 교향곡을 20대 청춘의 방황과 열정을 반영한 곡이라며 소설로 치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다고 하면서 이 곡을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불렀습니다. 말러를 평생 가까이에서 모셨던 발터의 말에 수긍하기에 나는 이 곡을 베르테르와 같이 심약한 청년 말러가 거인(Titan)의 꿈을 꾸며 방황하는 여정을 그린 곡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곡의 구성, 모두 4악장입니다
말러는 이 곡을 ‘교향시’라는 이름으로 1889년에 지휘봉을 쥐고 부다페스트에서 처음 연주했지만 결과는 참담하였습니다. 이때까지의 교향곡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말러는 작품을 수정 보완해서 3년 후 바이마르에서 다시 연주했습니다. 이때 ‘거인’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전체 악곡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제1부 ‘청춘의 날들’은 1악장 ‘끝없는 봄’, 2악장 ‘화원, 3악장 ‘순풍에 돛을 달고’의 세 악장으로 되었고, 제2부 ‘인간의 희극’은 4악장 ‘장송 행진곡’과 마지막 5악장 ‘지옥에서 천국’의 두 악장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완벽주의자 말러는 이 뒤에도 계속 곡을 수정 보완하면서 2악장 화원을 없앴고 각 악장의 제목도 모두 제거해서 오늘날과 같은 4악장의 교향곡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이 곡이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1악장은 긴 서주로 시작됩니다 전원의 새벽이 밝아오며 목관이 뻐꾸기 울음을 불어냅니다. 한적한 전원풍경이 가곡 ‘아침 들판을 걸으면’의 선율에 실려 나오다가 차츰 고양됩니다.

2악장은 시골의 춤입니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왈츠풍의 춤곡이 흥을 돋우며 펼쳐집니다.

3악장은 이 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장입니다 장송행진곡풍이면서도 가곡 ‘두 개의 파란 눈이’의 선율을 고요하면서도 아름답게 연주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오보에의 대선율(對旋律: 어떤 한 선율에 대립하여 움직이는 다른 성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4악장은 참았던 에너지를 폭풍처럼 격렬하게 쏟아붓는 격렬한 악장입니다 청년 말러의 고뇌와 괴로움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왜 발터가 이 곡을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도록 만드는 피날레 악장입니다.

브루노 발터(Bruno Walter)와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의 말러 연주
말러의 제자이자 가까운 벗이었던 발터가 콜럼비아 교향악단을 지휘한 연주는 말러 교향곡의 이정표 같은 연주입니다. 화요음악회에서는 이 연주로 들었습니다. 다음에 추천하고 싶은 연주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과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입니다.

1942년 발터가 독감에 걸렸을 때 대타로 나와 일약 스타가 된 번스타인은 그때 이미 말러 음악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 후 번스타인은 말러의 모든 교향곡을 차례대로 녹음하며 사후에 자칫 어둠에 묻힐 뻔한 말러를 다시 꺼내 오늘날 말러 신드롬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사무엘상 17장 45~47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골리앗)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 사람(골리앗)은 성경에 나오는 거인(巨人)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소년 다윗 앞에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사람의 크고 작음은 몸집의 크기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함에 있습니다. 말러는 거인이 되고 싶어 교향곡을 지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이름으로 삶의 현장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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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