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의 원인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공산주의 이상향을 향해 이전의 어떤 국가들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길을 지나온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불과 74년 만인 1991년 12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붕괴하고 만다.

60년대까지 대규모 노동 및 자원의 동원을 통해 잘 성장했던 소련 경제가 70년대 들어와 극복하기 어려운 만성적인 침체에 접어들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잘 사는 나라였지만 경제생활은 좋아지지 않았고, 소비생활은 사실상 점차 열악해져 갔다.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
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은 소련이 망하게 된 매우 중요한 이유이었다. 당시에 소련 지식인이나 노동자들의 희망은 과도기를 마친 소련이 서양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이와 같은 희망은 점차 식어갔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소련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서양 나라들의 주민생활과 많이 비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련 사람들은 미국에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소련의 공산당 간부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해외로 갈 수도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아무 때나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소련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 불가능했다. 물질적인 생활도 있었고, 개인의 자유도 김일성 시대의 북한보다는 많았지만 미국이나 서구에 비교하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불만이 1970년대 들어와 누구든지 생각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부들까지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제발전과 사회의 진보를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소련 정부가 했던 약속을 별로 믿지 않았고, 정부가 약속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전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구호를 반복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정치 놀음과 거짓말과 선동이라고 생각했다.

소련 정권의 이데올로기의 한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인민 대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타 제반의 사항에서 물적 토대인 민중에 기반하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런 토대와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교리에까지 비견되는 소련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존재 역시 필요하였고 무엇보다도 최상위에 있었다. 소련에서의 모든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에 규정 받았고 그 누구도 이것에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하나둘씩 드러나게 되고 그것이 붕괴의 주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어디에서 보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소련에서 그것은 희망 사항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당과 국가의 민주화를 가져왔다고 평가받는 고르바초프 집권기에도 민주적 의사 결정을 밟아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특권 계층의 권력 향유와 당의 독점과 부패
또한 소련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계급의 존재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런 소련사회를 붕괴하게 만든 치명적 문제점 중 하나가 사회 내의 특권 계층의 권력 향유와 당의 독점적 상태였다. 특권 계층은 권력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도 당과 인민을 영도할 정도의 역량이라는 측면에서는 무능력하였고 또한 부패하기까지 하였다.

이데올로기적 문제 중에 또 하나는 종교였다. 소련의 정신적 공허함과 공식적으로 물질에 가치를 둔 체제적 기반과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냉소주의 대립과, 소련의 도덕적 상황은 타락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종교 부활에까지 갔다. 종교의 부활은 ‘유물론’과의 전면적인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곧 유물론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교회가 공산당의 중대한 경쟁자로 출현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를 성공시키기 위해 정신적인 측면을 담당할 이데올로기가 부재하였고 교회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국가가 교회의 협력이 절실히 요청되어 교회에 손을 내민 것이다.

물론 위의 사안들은 러시아 정교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종교적 자유는 중앙아시아와 소수 민족의 고유 종교,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 역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이는 더 나아가 ‘민족주의’로 발전되고 민족문제와 소수민족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 붕괴 후 나타난 현상: 새로운 민족국가 출현
한때 세계에서 공산주의 종주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1991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붕괴된 후, 130개 이상의 종족 집단들(People Groups)이 모여 사는 커다란 지역이 된 15개 소비에트 공화국은 세계지도에 새로운 민족국가들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체제는 인종적으로 슬라브계를 비롯한 9개의 백인 공화국들과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6개의 아시아계 공화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작, 우즈벡, 크르그즈, 투르크멘, 아제리, 타지크 등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공화국이 공산 쿠데타 이후 차례로 독립했다.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속해 있는 아시아 공화국들 중에 타지크는 이란(페르시아)계이고, 나머지 카작, 우즈벡, 크르그즈, 투르크멘 공화국은 튀르크계(돌궐계) 민족들이다. 중앙아시아 김다니엘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지난 70년 ‘철의 장막(Iron Curtain)’ 속에 바벨론 포로와도 같은 유수기를 보냈던 튀르크 인들은 외부 세계를 볼 수도 없었고,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의 서방 기독교 국가들은 15개 연방 국가인 소련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고, 들어갈 수도 없는 금단의 구역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지역은 세계 교회가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복음은 철저하게 차단되었고, 중앙아시아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오랫동안 세계 선교의 밭 한가운데 깊이 박혀 숨겨져 있어야만 했다.”

사회적 현상의 변화(양극화, 과도기 경기 침체, 신기술 수입)
소련 붕괴 이후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이 생겨났다. 높은 교육을 받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간부들은(공산당 간부, 군인, 보위원 출신) 기득권으로 부와 권력을 누렸지만, 반면 일반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과도기 10년은 경기 침체 현상으로 낙후한 공장은 문을 닫고, 1990년대 말 들어와 사회주의 진영 국가에는 새로운 공장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 공장은 최신 기술을 쓰고, 세계 수준에 적합한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비교적 젊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취직됐다.

자연히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으나, 나이가 많고 옛날 기술만 아는 기술자들은 취업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나라에는 없었던 새로운 산업(식당, 상점, 자동차 수리소 등)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소련과 동구라파 국가들의 개방 정책 후 해외에서 새로운 지식과 기술, 새로운 물건과 장비, 시설 등이 많이 들어오게 되므로 인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이 많이 중요해지게 되고 뿐만 아니라 컴퓨터 혁명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반면 여성들에게는 이전보다 직장 생활이 어렵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여성 직장인들은 옛날처럼 육아 휴가가 가능하지만, 휴가를 받을 경우에는 직장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국민대 란코프 교수는 말한다.

종교정책의 변화로 인한 선교의 어려움 발생
러시아는 지난 2016년 6월 27일 발효된 ‘야로보이 법(Anti Missionary Law)’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선교사들이 추방되거나 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정부에 등록이 되지 않은 교회는 집회를 하지 못하거나, 집회를 해도 일반 주택에서는 갖지 못하고 공공건물에서만 모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믿는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는 법이 발효되어 선교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고 러시아의 이재영 선교사가 말한다.

현지인 교회는 대부분 지하교회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카자흐스탄과 쿠르크즈스탄 등 몇 국가에서는 제한적으로 현지인 교회를 등록시켜 주었다. 수년 전부터 우즈베키스탄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국가에 정식 교회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국가가 허락하지 않아 지하 가정교회의 형태로 어렵게 모임을 하고 있다. 특별히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종교탄압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경우는, 대통령의 장기 독재체제로 인해 극심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교회가 핍박과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하지만 성도들은 ‘무릇 경건하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으로 고난을 극복해 가고 있다. 문제는 많은 한인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고, 현재는 약 70여 명 정도 사역하고 있는데, 그 중에 반 정도는 직간접적으로 개인전도 및 제자양육 사역을 하고 있지만 나머지 반 정도의 선교사들은 감시와 통제로 활동 범위가 매우 위축되어 있고 두려움이 많아 교회 개척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중앙아시아의 김 다니엘 선교사는 말한다.

이슬람권의 부상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권이며, 이곳 주민인 튀르크 인들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이슬람화 되기 이전에 이들의 정신적, 현실적 문제를 지배했던 과거의 신앙과 종교들이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특별히 중앙아시아의 고대 종교였던 샤머니즘은 이들의 문화와 관습에 여전히 남아있으며, 사실상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무속적 이슬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이슬람 신앙은 신비주의와 미신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아왔다. 러시아에 의한 1세기 이상의 정복과 70여 년의 소련 공산주의 지배하에서의 현대화와 교육화, 이데올로기화로 이슬람은 수난을 겪었으나, 소련 연방이 와해되고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슬람 사원이 재건축되고, 이슬람 학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슬람 모자를 쓰는 사람이 늘어가고 쿠란과 하디스 등 이슬람 서적의 보급과 판매량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에서 파견된 이슬람 포교사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활동은 기독교 선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포교사들이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훨씬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최신식의 거대한 이슬람 사원, 문화원, 특수 전문학교 설립, 병원 설립, 대학 및 이슬람 대학 설립 등을 통하여 친 중동과 이슬람 전문가들을 양성하면서 이슬람으로 회귀를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