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공산권의 붕괴와 러시아지역 선교활동

핍박 받는 소련의 개신교회
1575년 러시아 황제는 모스크바에 개신교 교회의 건축을 허가했다. 이때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성 바돌로매(St. Batholomew)의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학살 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의 일이었다.

1695년에는 모스크바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들어섰으며, 당시 개신교도들은 제정 러시아 안에서 약간의 개종자들을 얻기는 하였으나 러시아 정교회의 엄청난 힘과 전통에 눌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러시아 내의 개신교는 19세기 이후 독일계 농민이 이주해 옴으로써 시작된 침례교 운동이 주축이 되어 크게 성장하게 된다.

공산혁명 이후 개신교에서는 침례교보다는 루터교와 칼빈주의가 핍박을 받았는데 이유는, 공산주의 시각에서는 루터는 중세 봉건 시대의 인간을 미신적 행위에서 해방시켰으나, 인간 내면에서 다시 노예화시킨 인물이었다. 칼빈은 자본주의를 일으킨 사악한 존재로 간주한 것이다.

1917년 레닌의 공산혁명 기간에 공산정권은 전 소련의 농토지를 국유화하기 시작했고, 대 지주의 농지를 빼앗아 집단 농장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복음주의 파와 침례교, 그리고 다른 몇몇 종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집단 농장화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온 대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신앙으로 이미 공동체 생활을 하며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부 기독교 공동체는 금주 운동과 사회 정화 운동을 하며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공산정권의 지지를 받았다.

빛과 어두움은 합치지 못한다, 완전히 사라진 종교적 자유
그러나 물과 기름은 도저히 섞일 수 없으며, 빛과 어두움이 서로 합치지 못하는 것처럼 어두움인 공산주의는 그들의 악의를 들어내고 말았다. 얼마 있지 않아 무신론 동맹인 공산정권은 ‘기독교 공동체 농장’과 ‘기독교 도시’ 계획을 무산시키고 해체시키며 교회 지도자들을 잡아 가두었다.

서방 기독교와 교류한 것을 스파이 혐의로, 종교 지도자들은 대지주와 같은 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산정권의 박해는 서서히 진행되었고, 1929년의 법령을 기점으로 해서 종교적 자유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초기 공산정권은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적 유산이라고 생각되는 미신들을 과학적 사고로 타파하고자 하였다. 성상 숭배, 수도사들의 주문과 같은 기도의 능력 등 러시아 정교회에 신앙적 유산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히 짓밟힐 때 개신교들은 끄떡없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파와 침례교들은 신앙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성경에 굳게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으로 글을 깨우치고 성경에 신앙의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정권은 침례교와 복음주의 파들을 탄압할 구실이 없었다.

1923년, 성경을 법정에 세운 소련 공산정권
마침내 공산정권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1923년 ‘성경’을 법정에 세운 것이었다. 판결문은 ‘성경은 역사적 유물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므로 모든 신앙인은 성경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9년의 법령은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예배 외에 어떤 교회 활동도 금지되었고, 목사들은 체포되었고, 교회당은 철거되었다. 1935년 침례교 연맹은 불법화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긴 암흑의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소련 기독교 교회를 점차 구원해 내시는 역사를 하셨다. 다행히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공산정부 주도에 의해 ‘복음주의 침례교 연맹(The Union of Evangelical Christians-Baptists : ECB)’ 이 탄생되었다. 많은 개신교파들이 이 연맹에 가입되었다.

이 연맹은 소련의 개신교 대표가 되어 성경도 발간하게 되고, 교회당도 다시 세우는 등 선교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농장의 변형인 공산주의의 집단 농장과 노동자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인종적으로는 전체 소련인에 걸쳐 있었다.

이 교단 안에는 45개의 지방회(노회)가 있었고, 그 산하에는 200개까지의 교회가 있었다. 각 교회는 연맹에 헌금을 냈다.

종교적 조직을 소련 정부가 허용한 이유
이런 종교적 조직을 소련 정부가 허용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종교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종교 말살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음성적으로 활동하던 교회를 양성적으로 활동하게 하여 감시가 가능해졌고, 정부의 조직 하에 있게 함으로써 필요할 때 정부의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토가 된 지역의 주민들을 교회를 이용하여 소련 정권에 순응하도록 하였다. 무신론 국가인 소련에 반감을 품고 있었을 폴란드, 발틱 3국 등의 주민들이 교회를 통해 소련 국민이 되어 갈 수 있었다.

소련 정부의 교회에 대한 호의는 결국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9년을 기점으로 탄압은 다시 시작되었다. 연맹의 간행물은 폐간되었다. 지방의 목회자들은 다시 체포되었다. 특히 후르시초프 시대의 박해는 더욱 심하였다.

어린이들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고, 30세 이전의 세례는 가능한 금지되었다. 1962년까지 100명이 넘는 침례교 목사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핍박을 심하게 당할수록 더욱 확장되어 나갔다. 1965년, 정부의 통제 하에 있는 ‘복음주의 침례교 연맹’에 분리 운동이 생겨 비 공인 교회들끼리 연맹을 결성한 것으로 지하교회 연맹인 ‘복음주의-침례교 공의회(The Council of Churches of Evangelical Christians-Baptists : CCECB)’를 결성하였다. 공의회 측은 1964년 체포된 기독교 가족들을 돌보며 탄압을 받았다.

당시, 연맹(ECB) 측의 교인 수는 30만에서 200만 정도이며(1988년 자료), 공의회(CCECB)의 교인 수는 5만에서 10만 사이였다. 한편 침례교와 복음주의 교회의 생명력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개종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충성된 목자들
긴 탄압의 어두움 가운데서도 복음주의 파와 침례교가 유지되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이나, 목회자들의 헌신과 사랑이었다. 이들의 헌신은 ‘충성된 목자’ 그 자체였다. 소련 정권은 목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늘 구실을 찾았다.

그러나 목사들의 삶은 목회 현장에서 헌신적이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양떼들과 어려움을 나누었고, 한 인간으로서, 목회자로서, 또 소련 시민으로서 모범이 되었다. 24가지 계율이 목회자들에게 있었는데 몇 가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삶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하라, 성도들에게 죄와 싸워 이기도록 하고 성도들에게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라, 영성을 기르고 성경을 연구하라, 물질에 있어서 검소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라, 양떼를 사랑하라, 편견을 갖지 말고 거부감 나는 양떼를 더욱 사랑하라, 양떼에 대하여 알아라, 양떼의 수에 관심을 갖고 개인적인 상황을 파악하라,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달란트, 기쁨, 슬픔, 가족관계에 관심을 가져라, 양떼의 집에 심방하라, 약하고 아프고 슬퍼하는 자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으라, 너의 외모를 깨끗이 하라, 너의 사회적, 국가적 의무를 다 이행하라, 이 일을 교인들에게 교육시키고 교회가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라.”

목회자들은 자기 양떼를 돌보는데 부지런하였을 뿐 아니라 비 기독교인에게도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과 상한 심령에 애정을 베풀었다.

이렇게 되자 목회자가 있는 곳에서는 일반 시민이 공산당원보다도 목회자들을 더욱 신뢰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공산정권은 이런 사실을 묵과할 수 없어서 목회자들을 중상 모함하기 시작했다.

목사들이 가족 관계를 파괴시키고, 남녀 관계를 이간시키며, 돈을 훔친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다. 심지어는 소설을 통하여서 또는 직접적인 탄압을 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