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10인의 기독교 사상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위대한 10인의 기독교 사상가로 3-5세기에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11-13세기의 안셈과 아퀴나스, 15-16세기의 루터,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18세기의 에드워즈, 19-20세기의 바르트와 루이스를 꼽았다.
정성욱 교수는 4~5명의 신학자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포함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칼빈이 루터에 이어 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종교개혁의 사상적, 신학적 완성자라면, 에드워즈는 종교개혁 이후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로서 영적으로 타락한 미국 뉴잉글랜드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였다.
칼빈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 칼빈은 루터의 저작을 통해 회심하여 종교개혁의 오(5)직-성경, 그리스도, 은혜, 믿음, 하나님께 영광-과 만인제사장의 6가지 원리로 루터신학을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여 개혁신학과 전통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자기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칼빈과 달리 에드워즈는 신앙의 경험적, 감정적 측면을 세밀하게 연구하여 강조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계속적으로 강조하여 신학적 미학을 이끌어 낸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에드워즈는 신학과 철학, 과학의 통합을 추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일반학문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 신학의 특징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 잘 요약되어 있듯이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도신경처럼 삼위일체적 사유체계를 가진다. 그의 신학의 핵심은 내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에 대해 강조하며, 모든 만물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고 돌려드리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강조하여 본받게 인도하였고, 말씀을 읽을 때 진리를 이해하게 해주며 성화를 이끌어가시는 성령을 강조하였으며, 은사론은 좋아하지 않았다.
칼빈은 교회가 모든 성도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여 교회를 떠나는 것은 고아가 되는 것이기에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신앙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하였으며, 오직 은혜로 구원받아 오직 믿음으로 드러나는 구원론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구약의 옛언약과 신약의 새언약으로 이해하여 두 언약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강조한 균형 있는 언약신학을 추구하였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 칼빈과 에드워즈는 16세기와 18세기에 각각 5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종교개혁 이후 영국의 청교도 신앙이 미국에 들어왔을 때 영국은 청교도 신앙이 끝나던 시기였으며 미국은 영적으로 타락한 시기였다. 가장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 에드워즈가 뉴잉글랜드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종교개혁과 미국의 영적대각성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에드워즈는 신앙의 경험적 측면, 감정적 측면을 연구했고 체험했으며 다른 청교도들보다 더 발전된 의미로 본인이 체험한 것을 강조했으며 이것이 칼빈과 대조적이다. 칼빈은 자신의 내면적 감정, 정서가 많지 않으나 에드워즈는 자유롭게 표현하는 정서가 있어서 발전적으로 보여주었다.
루터와 칼빈이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썼던 것에 비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많이 사용하고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림자와 모형으로 보았다.
에드워즈 신학의 특징 성경중심이다. 성경의 여백에 자신의 주를 달아 놓은 것이 유명하다. 성경중심주의를 추구하고,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고 16-17세기 개혁주의적 언약신학까지 수용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며, 신앙적 감성을 중요시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감성이 있어야 하고, 실천적인 측면을 더 강조했다. 신앙적 실천 특히,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것들을 위해 감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도 강조하였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가 지성을 조명한 반면,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삶에서 열매 맺게 한다.
칼빈과 에드워즈의 유사점 둘 다 천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빠진 사람들이고 은혜를 강조하고 은혜로 가득 차있다. 칼빈은 어거스틴, 아타나시우스 등 신앙의 선배로부터 잘 배웠으며 교부의 저작을 다 외울 정도였고, 철학과 일반학문을 잘 배웠다.
칼빈은 법학, 고대철학, 스토아학파에 에드워즈는 과학 같은 일반학문에 더 들어가 통달했다. 이단들과 싸웠을 때 두려움이 없었다. 칼빈이나 에드워즈는 이단과 논쟁이 많았다. 성경만이 기독교 진리를 보여주고,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실천을 가져다 준다.
칼빈과 에드워즈의 차이점 신앙의 체험적, 감성적 측면을 칼빈보다 훨씬 더 강조하고 표현했으며 부인 사라 에드워즈는 신비적 은사체험을 했다. 선교를 강조했고, 칼빈의 제네바 교회에서도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한 적이 있으나 교회정비가 우선이었다.
에드워즈는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이며 삶을 드렸기에 칼빈보다 더 나아갔다. 루터나 칼빈보다 에드워즈는 예표론적, 모형론적 해석을 했고 강조했다. 에드워즈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루터와 칼빈이 못 받아들이더라도 교부들이 그랬던 것을 따랐으며 에드워즈는 일반학문과 철학에 칼빈보다 넓고 깊이가 있었다. 차이가 있더라도 은혜의 복음에 대한 성령에 의지하는 것은 유사함이 많다.
에드워즈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다가 쫓겨났다. 윤리적으로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의 성찬참여 여부를 강조하다가 쫓겨났다.
에드워즈의 교회론과 현대 한국교회적 의미
아우구스티누스가 루터, 칼빈, 에드워즈를 포함하여 교회역사적으로 복음에 충실했던 4대 신학자에 포함되기는 하여도 그의 삼위일체론, 죄론, 은혜론, 구원론이 매우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것에 비하여 교회론이나 마리아론에는 카톨릭적 요소가 배태되어 있기에 논란이 되기도 하다.
에드워즈는 영미 청교도적 개혁신학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 놓은 신학자이다. 그의 교회론의 첫 번째 특징은 구속언약이다. 17세기 개혁파 언약신학의 구속언약(창세전 언약)-행위언약(선악과 언약, 창세기2:16-17)-은혜언약(여자의 후손 언약, 창세기3:15)의 삼중구조를 받아들였다. 창세전에 영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간의 언약이 체결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 언약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언약으로 에드워즈는 이 구속을 창조보다 더 위대하게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론적 차원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언약의 핵심에 위치하며, 구속언약을 맺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속하려고 하는 대상은 바로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교회를 생각하고 계셨다.
두 번째 특징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가 현재 가지고 있는 영광과 미래에 소유하게 될 영원한 영광뿐만 아니라 교회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찬에 참가할 자격을 거룩한 윤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로 제한시키려고 하였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강조한 에드워즈의 신학사상은 전통적인 은혜언약을 결혼언약으로 부르며 구속언약과 구별된다. 그리스도와 영적인 결혼으로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광스러운 복을 누리게 된다.
세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의 교회론의 한 축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것과 다른 축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가 연합한 상태를 신비적 그리스도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이 신비적으로 확대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머리 되신 예수그리스도는 몸된 교회를 향해 명령, 지시, 지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초림시 예수님이 몸을 통하여 하신 일을 교회가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특징은, 성찬이 그리스도와 연합, 성도들 간의 연합을 상징한다. 에드워즈에 있어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먹고, 마시고 누리기 위한 의식이다. 영적인 식탁이며 잔치이며 성찬을 통해서 교회는 다가올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때문에 교회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에 거룩한 제한을 두려고 하였으나, 외조부 솔로몬 스토더드 목사와 충돌되었고 20년 넘게 목회자로 섬기던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현대 한국교회적 의미
교회 기원의 영원성에 대한 바른 의식 교회 기원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세대주의적 신학을 추구하는 자들의 주장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하자 신약시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 안에서의 구속언약 단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 경륜의 중심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누구든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영광과 책임 첫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로운 존재가 교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교회다. 둘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것은 교회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의미한다. 가장 고상한 곳이기에 교회가 타락하면 너무너무 더러워진다. 셋째, 신부인 교회가 가진 놀라운 책임과 의무를 함축한다. 신부와 아내로서 교회는 신랑 앞에서 정절과 절제를 지키는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으로의 교회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린다. 머리와 몸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과 그 연합의 유기적 성격과 친밀성을 강조한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면 죽음이듯이, 머리와 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장애가 발생한다. 머리 되신 주님과 연결되어있더라도 연결의 유기성과 긴밀성이 약해지면 교회는 장애를 일으킨다. 몸인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명령과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고집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교회의 회원권과 성찬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이름뿐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성찬 참여자격 기준을 높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외조부가 갔던 편하고 넓은 길을 가지 않아서 오랫동안 목회했던 교회에서 추방되었지만 그의 확고한 신학적 입장처럼, 교회의 회원권과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을 유명무실한 교인들에게 주지 않아야 한다.
회원권 자격기준을 강화하는 것이고, 영적 윤리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가시적 거룩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교인들을 성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불편함을 경험해야 교회의 내면적 정체성을 지키고 영적 수준을 높여갈 수 있다.
상실의 시대의 영적 모범으로서 조나단 에드워즈
심현찬 원장의 강의는 ‘이중적 상실의 시대’를 사는 한국교회, 우리 이민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에드워즈를 통해서, 어떻게 이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건강하고 성경적인 경건과 목회자의 참 모습을 회복하고, 나아가 그리고 이민교회의 회복과 갱신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
지금 시대상황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종교, 하나님, 이성, 자아, 역사 등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며 종교적, 윤리적으로 극단적 상대주의와 극단적 다원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보여준 골룸의 탐욕스런 모습을 가져와 차용한다면 돈, 권력, 성욕의 삼중적 탐욕의 반지에 붙들린 한국교회의 골럼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골럼 증후군이란 신학적인 면에서 신앙의 균형상실을 보며, 신앙 깊이와 총체적 상실과 부재, 물질주의적 태도, 신앙의 실천성과 공적 신앙의 상실을 보게 된다.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로마서12:1-2의 생활 전반에 걸친 신앙의 공공성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대안이자 영적 모범으로서, 에드워즈의 성도로서의 영성과 목회자로서의 설교자, 신학자, 해석학자의 삼중적 측면을 제시한다.
왜, 이중적 상실의 시대에 에드워즈인가? 그것은 그의 경건한 목회와 신학이 참된 기독교인으로서 정수이며, 통전적인 균형의 영성과 목회의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서 죽어갈 때 쓴 일기를 편집하여 출간하면서 서론에서 전기의 가치를 주장하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앙은 교리와 모범을 통해 배운다고 하였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회복과 갱신을 기도한다면 에드워즈의 모범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 페리밀러는 에드워즈를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였고, 마틴 로이드 존스는 교회사에서 에드워즈를 청교도의 최고봉으로 표현하였다. 청교도를 알프스에,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라고 하였다.
모범으로서 자전적 삼부작(결심문, 일기, 자서전)은 에드워즈의 전 생애의 사역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평생의 목회적 모습을 볼 수 있다. 결심문은 70개의 영적 자기 점검표이며, 일기는 경건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의 내면세계를 본다. 일기와 결심문을 적은 지 20년 후에 쓴 자서전은 성숙한 모습과 균형 잡힌 성도의 모습을 본다.
이것들을 통해 첫째, 에드워즈의 통전적(총체적)인 탁월성과 균형: 영적 순례자, 영적 전사, 실천적 경건의 모습(거룩한 습관), 균형의 영성을 본다. 그는 말씀을 사모하여 성경묵상노트와 여백성경을 만들었다. 둘째, 균형의 인격적인 모습을 본다. 디모데전서1:17을 읽고 나서 회심하여 울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고백하고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시간을 관리하며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셋째, 통합적인 관계성의 균형으로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목회자로서 보여주는 에드워즈의 모범은 첫째, 균형 잡힌 설교자의 모습이다. 죄 각성의 문제, 율법과 복음, 이성과 성경을 주제로 전하며, 본문, 교리, 적용이 그의 설교의 결정적 형식이다. 대표설교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과 ‘신적이며 초월적인 빛’이 있다.
둘째, 신학자 에드워즈는 신학공부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교에서 강조하였다. 저서 ‘신앙정서론’, ‘천지창조의 목적’에 신학자로서의 모습이 나타난다. 거룩한 정서가 없이는 참된 신앙이 없으며, 영성이란 거룩한 빛과 열이 있고 빛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열은 성령의 뜨거운 열기다. 에드워즈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빛과 열의 균형이다. 또,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구속적 해석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거스틴이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다면, 구속적 역사학자로서 에드워즈는 ‘구속사역의 역사’에서 역사를 부흥중심으로 보았다. 또, ‘신적인 것들의 이미지’에서는 구속적 문화 해석학자로서 우주에 대한 모형론을 보여주며, 하나님은 예표로서 하등의 물질을 창조했으며, 피조물은 하나님의 음성이자 언어라고 강조했다.
마스던에 의해 미국신학의 북극성이라고 불린 에드워즈는 복음주의 균형있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 중심의 통합적인 삶을 살아온 에드워즈의 인생을 소개하면서, 심현찬 원장은 한국교회와 뉴질랜드 이민교회의 목회자들이 목회자, 설교자, 신학자, 해석학자의 모습을 갖고 있는지, 통전적 리더의 모습을 갖고 있는지, 또,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교제에 힘쓰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예수그리스도를 인도하는 나침반 같은 존재로서의 세례 요한처럼, 부흥의 시작은 에드워즈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 부흥이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뉴질랜드 이민교회가 참된 회복과 부흥의 불꽃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조나단 에드워즈 설교.신학: 구원의 교향곡으로서 설교.신학
한국 교회의 설교의 현실에 대한 진단 주목할 현실은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현상이다. 복음의 순전성보다 달콤한 유사복음, 성경본문의 침묵, 웃기는 설교의 전성시대를 본다. 복음의 총체성과 균형의 부재이며 본문에 침묵하고 변증만 많다. 성경 66권의 충만한 복음의 메시지가 총체적이고 균형 있게 전달되지 않는다. 또, 설교의 적용과 실천성의 부재로 공적 신앙으로 나가지 못한다. 설교자의 자격과 인성의 문제이다. 포스트모던시대 설교의 유효성 대해 오해하여 설교에 대한 가치의 상실을 본다.
왜 에드워즈의 설교인가? 에드워즈의 신학과 설교는 기독교의 정수와 묘미를 보여주고 개혁주의 전통의 정수이며 청교도의 최고봉이다. 에드워즈는 교회사의 에베레스트 위치에 있으며 한국 교회의 대안적인 인물이며 삶과 목회와 설교 모든 면에서 균형과 탁월성 모범이 된다.
왜, 에드워즈의 설교론이 중요한가? 에드워즈는 설교자였고, 교회사 최고봉이자 청교도 강해설교의 모범이며,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 설교자, 신학자이며 구원의 교향곡적인 설교를 주었다.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며, 그의 설교는 성도의 구원에 관심이 있어 복음의 본질에 집중했다. 성경 66권을 균형 있게 증거되도록 노력했으며 그의 관심사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가도록 목양하는 것이라고 회자된다.
에드워즈의 설교신학은 무엇인가? 예배의 배경과 특징으로 첫째, 공공기도를 30분했다. 둘째, 형식, 주제, 요소이다. 에드워즈가 영향 받은 저서 중 윌리엄 파킨스의 ‘설교의 기술’에서 본문, 교리, 적용의 원리를 배웠고, 존 에드워드의 ‘설교자’에서 사랑과 겸손을 가진 정서가 필요하고 설교의 목적은 적용에 있다는 것, 그리고 코턴 마더의 ‘목회교범’으로부터 목회자의 영적 준비성을 지적하였다. 서재에서 설교단까지 무릎으로 직접 가는 것을 강조한다. 기도의 신앙이 중요하며 목회자로서 영적인 준비와 기도 없이는 목회나 설교를 할 수 없음을 깨우친다.
에드워즈의 설교 멘토는 부친인 티모시 에드워즈이며, 본문, 교리, 적용을 강조하고, 23개의 소대지와 44개의 적용을 강조했다.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성경을 인용했다.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는 조직적인 설교와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여 질문과 대답형식을 강조하고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였고 부흥, 지옥불, 질책을 강조하는 강력한 설교자였다.
설교의 시기와 구분 수련기인 초창기와, 숙련기인 중기와, 말기에 설교형식이 바뀐다. 풀 원고에서 개요설교로 바뀌고 인디언설교는 187편이나 한다. 원주민에게는 맞춤식 설교로 바뀌어 스토리 중심적이며, 이미지 중심, 단순성을 강조한다.
설교와 설교자의 중요성과 임무, 목적과 필요성 포스트모던시대를 사는 현대인과 교회는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중요성을 잠시 간과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사역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하며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소명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라고 하였으며, ‘기독교에서 절실한 표현은 참된 설교다’라고 하였다.
그의 멘토 에드워즈는 구속 사역에서 설교를 최고로 여겼고, 목회자로서 성도의 구원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의 모든 저술은 설교로 통하고 설교로 귀결되었으며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하였다.
구원의 교향곡적 설교의 특징 잘 드러나는 에드워즈의 청교도적 설교의 형식과 주제들을 살펴보면, 형식은 성경, 교리, 적용으로 성경본문에 충실하고 교리가 충만하고 실천과 소통의 중심으로 한다. 주제는 통일성, 총체성, 우주성의 균형이다. 통일성에서 기독교의 본질인 성도의 구원을 말하고, 총체성에서 율법과 복음, 죄와 지옥, 부흥과 경건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등 모든 것을 다뤄야 하며, 우주성에서 지상과 지옥의 참담함과 천국의 아름다움 등 3차원적인 모든 것을 말한다. 요소에는 지성, 열정, 이미지가 균형을 이룬다. 이 모든 것이 균형 있게 나타나며, 불타는 신학이며 불과 빛을 겸비한 설교다.
에드워즈의 대표적인 설교 세 편 그의 설교 세 편은 ‘진노하신 하나님 손에 붙들린 죄인들’에서 각성설교와 지옥설교이고, ‘신적이고 초월적인 빛’이 구원론의 가장 신학적이고 탁월한 설교이며, ‘천국은 사랑의 나라’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과 그 열매 설교 시리즈이다. 교향곡적인 면인 형식상 청교도의 사명의식을 잘 보여준다. 형식상의 성경, 교리, 적용 중심은 3중 적인 균형과 조화를 보여주며, 주제면에서 통일성, 총체성, 우주성의 균형을 그리고 요소적으로 지성, 정서, 이미지 균형을 잘 표현한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적용점
첫째, 에드워즈의 설교는 한국과 이민교회의 대안과 모델로 설교의 형식과 주제와 요소를 통해 교향곡적인 설교를 보여줌으로써 성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여기서 형식상, 성경-교리-적용의 균형; 주제상, 통일성-총체성-우주성의 균형; 요소상, 이성-열정-이미지의 균형의 설교임을 보게 된다. 에드워즈에 대한 비판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논리와 신학적, 철학적 내용과 호흡이 긴 설교, 적용 등 주제설교적인 방법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인용과 해석이 극단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설교토양에 그의 성도의 구원을 위해 교향곡적인 설교의 원리는 매우 귀중한 대안이 될 것이다.
둘째, 에드워즈의 구원의 교향곡적 설교를 회복해야 하며, 설교 형식과 주제 면에서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설교형식에서는 성경, 교리, 신학이 충만한 설교로 소통의 설교가 필요하다. 성경적인 통일성, 총체성, 우주성의 균형의 회복이 필요하며, 구원의 주제에 집중해야 하고, 66권에서 주는 포괄적 주제를 다뤄야 한다. 율법, 죄, 성화 등 지옥까지도 균형 있게 설교해야 한다. 또, 설교요소에서 이성, 열정, 이미지의 균형의 회복이 요구된다. 이성적 접근으로 냉랭하지 않도록 하여 성령에 붙들린 열정, 성도의 눈높이로 안내하는 이미지 균형이 중요하다.
셋째,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설교자의 설교, 목회, 인격의 총체적인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기독교 교양’에서 설교자의 참다운 설교는 설교자의 삶에서 더욱 웅변적으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에드워즈의 저서가 그칠 줄 모르는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삶은 훨씬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인격과 목회, 즉, 신앙의 본질을 향한 평생의 몸부림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가 크다.
심현찬 원장은 강의를 끝내면서, 한국교회 목회자는 설교, 목회, 인격에서, 성도들은 신앙, 일, 인격에서 각각 총체적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설교와 목회사역의 영광과 그 무게를 재인식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전하였다.
글/이경찬 집사(평강교회)
지난 2월 22일 뉴질랜드 알파크루시스 신학교 한국어학부가 주최한 조나단 에드워즈 온라인 컨퍼런스에서 강의한 심현찬 원장<워싱턴 트리니티연구원>의 내용을 이경찬 졸업생<뉴질랜드 알파크루시스 신학교 한국어학부>이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