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고픈 아이로 만들지 말라

요즘 아이들은 재미있는 활동을 많이 한다. 가운을 입고 온몸에 물감을 묻히며 활동하는 퍼포먼스 미술, 입체적 사고력뿐 아니라 수 개념까지 배울 수 있는 나무 블록 같은 것들 말이다. 밀가루 놀이방, 소금 놀이방까지 있다. 은율이도 저런 활동들을 좋아한다.

나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 형편이 나은 친구의 집에 레고와 색색의 전집이 있었을 뿐, 대부분은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 전부였다. 초등학교에 가서는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영유아들이 누리는 교육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창문에 그림 그리기, 벽에 분필로 낙서하기, 아니면 종이 인형 만들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교육기관도 요즘은 정말 다양하다. 돌이 되기 전부터 기관을 경험할 수 있다.

프로그램보다 엄마 품에서 키운 아이들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이 있다. 공영방송 리포터였던 분으로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톡톡 튀는 말투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남다르다는 생각은 했다.

어느 날 그분은 식사 자리에서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와 더불어 경력이 단절된 게 아쉽다고 했다. 월급의 절반을 드린다 해도 양가 모두 아이를 맡아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린이집에 맡기지 그러셨어요?” 하자 “우리 때는 그런 게 없었어. 지금은 세상이 좋아졌지.”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 애가 너무 잘 컸어.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봐야 했는데, 정서적으로 부족함 없이 커서 정말 잘 자랐어.” 하며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친구 중에 아들을 사랑으로 무척 잘 키우는 M이라는 친구가 있다. 대한민국에 이런 엄마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다양한 놀이와 책으로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어릴 때 엄마와 보내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엄마는 날마다 새로운 것들을 가져와 나와 놀아주었다. 무엇보다 엄마는 나와 항상 함께해 주었다.”

그 친구는 엄마와의 유년 시절의 경험 그대로를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친구 엄마는 명문 여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했었는데, 당시 기관이 없어 한 아주머니에게 친구를 맡겼다고 한다. 친구가 “아주머니랑 있느니 그냥 집에 혼자 있을래.”라는 말을 한 날, 친구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경력이 단절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임이 틀림없다. 당시는 육아 휴직 제도도 잘 되어 있지 않아 퇴직을 선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 친구의 아들도, 리포터 출신 지인의 아들도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을 택할 것인가, 아이를 택할 것인가는 엄마들의 끊임없는 고민이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지나치게 일찍 기관에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아이와 같이 보내는 시간은 낭비나 희생이 아닌 투자다

많은 전문가가 말하듯이 나 역시 생후 3년간은 아기가 엄마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아이를 기관에 위탁할 때 배움의 자극을 받으며 또래와 재미있게 놀이를 한다는 것에 주된 포커스를 맞추는 것 같다.

은율이가 만 네 살이던 어느 날 어린이집 상담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통상 아이들은 9시에 등원해 두세 시, 늦으면 다섯 시까지 시간을 보낸다. 많게는 하루에 8시간을 기관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곳에는 사적인 공간이라고는 없었다. 아이들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혼자 편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관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혼자 뒹굴뒹굴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도 없다.

잠시의 상담 시간 동안에도 나는 여러 방에서 들리는 말소리, 울음소리 등을 들었다. 그날은 듣지 못했지만, 간혹 일어나는 싸움 소리도 있을 것이다. 규율 속에 장시간 있는 것도 자유분방한 어린아이에게는 힘겨울 수 있다. 어른조차 견디기 쉽지 않은 시간이라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은율이와 어린이집을 나와 놀이터로 갔다. 어린이집 창문 너머로 선생님의 타이르고 훈계하는 음성이 들렸다. 한낮의 고요한 햇살과 새소리를 들으며 지금의 은율이에게는 엄마 품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율이 역시 아직은 다니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뜻을 밝혔다.

카메라가 뭔지 모르던 시절

사랑이라고 하면 흔히 추상명사나 형용사로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다. 설레는 감정 또는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학시절 기독 동아리의 설교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다. 사랑의 대명사로 알려진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는 않다.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목숨을 버리신 의지적 행동이다. 이렇듯 사랑은 동사다.

개리 채프먼의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5가지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이다.

이 가운데 ‘함께하는 시간’이 영유아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른 것들은 복구가 가능할 수 있지만 시간은 지나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의 질이 중요하지 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다 안다. 아이들이 특정 시기에 얼마나 엄마에게 붙어있기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엄마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을.

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불필요한 행동을 하게 끔 디자인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영유아가 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엄마를 찾는 것은 그 시기에 엄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본능적인 행동을 억지로 제지하며 아이를 떼어 놓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날 은율이와 물고기를 사러 마트에 갔다. 직원 아주머니는 “어머, 몇 개월 사이에 정말 많이 컸네. 엄마 사랑 먹고 큰 거지? 아이들은 정말 엄마의 사랑을 먹고 큰다니까.”라고 하셨다. 참 옳은 말씀이었다.

많은 연구결과에서 보여주듯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신체적 언어적 발달이 빠르다. 스트레스를 이기는데 에너지를 덜 빼앗기기에 온전히 발달에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다.

창의력, 사회성, 내면의 힘, 틀어진 부모와의 관계 회복, 회복 탄력성, 그리고 모험심. 이 모든 것을 아이가 갖출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명보다 귀한 내 아이를 위해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지는 자명하다.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희생이 아닌 가장 현명한 투자이다.

최소한 3년은 엄마 껌딱지로 살게 해주자. 가장 현명한 인생 투자가 될 것이다.

이전 기사“2021년도의 리커넥트”
다음 기사왕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
강 혜진
고려대 및 한동대 국제로스쿨 졸업, 뉴질랜드 FamilyMinistries 학교수료.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어린 시절이며 육아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믿음으로 자발적 경단녀로서 양적 질적 시간을 꽉꽉 채운 가정양육을 하며 느낀 경이롭고 행복한 과정을 글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인스타: miracley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