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

코로나로 얼룩지고 록다운(lockdown)으로 무거워지고 힘들고 답답한 한 해였지만 어느새 12월이 되었습니다. 과연 삶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하루하루였지만 이럴수록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신 저 높은 곳의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 들으면 좋은 곡이 콜 니드라이(Kol Nidrei)여서 화요음악회에서 같이 들었습니다.

막스 브루흐(Max Bruch 1838~1920)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브루흐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평소 여러 나라의 민속 음악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어 유대교의 풍습을 묘사한 곡도 여러 개 작곡하였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콜 니드라이(Kol Nidrei Op. 47)입니다.

콜 니드라이는 연주 시간이 불과 10분을 조금 넘는 소품이지만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과 더불어 우리에게 그의 이름을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곡입니다.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의 격정적인 삶과는 달리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삶을 영위했던 그는 음악도 새로운 사조보다는 감정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표현하려는 독일 낭만주의 전통을 따르려 했습니다.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인교육과 그의 가슴속에 뿌리박은 깊은 신앙심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온건과 낭만, 그리고 경건한 아름다움의 원천이었습니다.

‘관현악과 하프가 함께하는 첼로를 위한 아다지오’라는 환상곡 형식의 콜 니드라이는 결코 대작은 아니지만 브루흐의 참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신(神)의 날
콜 니드라이’는신의 날’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의 예배 의식은 오로지 낭송(chant)으로만 이루어지는데 속죄의 날’인욤 키푸르(Yom Kippur)’에는 대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일 년에 꼭 한 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속죄의 날 전야(前夜)에 부르던 아주 오래되고 특별한 ‘콜 니드레(Kol Nidre, 모든 서약들)’라는 유대교의 옛 성가가 있습니다. 브루흐가 이 곡의 선율을 이용하여 변주곡 혹은 환상곡 형식으로 재창조한 곡이 ‘콜 니드라이’입니다.

브루흐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이 곡을 작곡했기에 유대인으로 의심받아 그가 죽은 뒤에 그의 가족들이 나치 정권에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선 후 10여 년에 걸쳐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곡은 유대인이나 유대인의 선민의식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정신 가운데서 가장 숭고한 신(神) 앞에서의 참회와 속죄를 일깨워주는 경건한 작품입니다.

신성하고 종교적이면서도 어딘지 동양적인 슬픔이 잔뜩 묻어 나오는 이 곡은 처음부터 조용하고 비통한 선율로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작입니다. 이 시작을 듣다 보면 문득 생각나는 그림과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습니다.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신(神)의 날(Day of Gods)
고갱과 브루흐는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브루흐는 음악으로 신(神)의 날을 묘사했지만 그보다 10년 뒤에 태어난 고갱은 그림으로 신의 날을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브루흐의 ‘신(神)의 날’의 신은 유일신이었지만 고갱의 ‘신(神)의 날’의 신은 복수(複數)의 신이었습니다. 삶과 예술의 근원을 찾기 위해 문명의 도시를 떠나 타히티(Tahiti)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고갱은 이 그림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원주민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는 고뇌하는 고갱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풍을 “눈 밖에서만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신비스러운 두뇌의 중심부에서는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그였지만 사실은 스스로가 방황하고 있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모든 일에 종교성이 많았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보았으니(사도행전 17:23)”라고 외쳤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방황의 끝에 서 있던 고갱은 ‘신의 날’의 그림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는 원주민의 모습을 그렸지만 아마도 그림 안에는 고갱 자신의 모습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갱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려온 그림들, ‘설교 후의 환상-야곱과 천사의 싸움’(1888), 황색 그리스도(1889), 녹색 그리스도(1889) 등은 평생 신(神)을 찾았던 고갱의 삶의 행적을 보여줍니다. 방황과 절망의 끝에서 그는 유언과 다름없는 작품을 그립니다.

그의 말기 작품이며 최대의 걸작인 이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였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열정과 힘을 다해 그린 이 대작을 통해 그는 삶의 불가사의를 묘사하려 했습니다.

워낙 뜻이 깊은 그림이기에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지만 고갱은 이 그림의 제목을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정할 때 이미 마음속에 답을 찾아놓았을 것입니다.

그 답은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가 아니었을까요? 이 그림을 그리기 3년 전에 ‘신(神)의 날’과 같은 작품을 그렸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콜 니드라이(Kol Nidrei Op. 47), 관현악과 하프가 함께하는 첼로를 위한 아다지오
예술과 자연을 통해 삶의 비밀을 깨닫고 싶었던 고갱은 (복수의)‘신(神)의 날’을 그릴 수밖에 없었지만 믿음 안에 평생 흔들림이 없었던 브루흐는 (유일)‘신(神)의 날’을 작곡했습니다.

브루흐는 자기의 곡을 스스로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지휘대에 섰기에 그의 모습이 수도사와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특히 이 <콜 니드라이>를 지휘할 때는 그 얼굴이 아주 성스럽게 변화하여 첼리스트를 비롯한 연주자 모두가 감동하여 다 같이 엄숙하게 연주했다고 합니다.

조용하면서도 슬픈 선율로 시작하여 처음부터 종교적 내음이 짙은 이 곡은 중간 곳곳에 독주 악기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부분들이 있어 연주가 결코 쉽지 않지만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어 하는 곡입니다.

적절히 뒷받침해주는 관현악과 더불어 첼로가 그 풍부한 표현력과 진한 호소력으로 유대적인 정서와 동양적인 쓸쓸한 가락, 그리고 낭만적인 정취를 마음껏 노래하는 이 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1부 Adagio ma non Troppo: 조용하고 비통한 선율로 시작되는 첫 부분은 가슴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슬픔을 불러냅니다. 그 슬픔은 억제할 수도, 결코 거역할 수도 없는 근원적 슬픔입니다.

이어서 유연하고 엄숙한 선율이 첼로의 활과 현을 타고 다가와 우리의 고막을 흔들어 깨웁니다. 명상적이면서 장엄하기까지 한 첼로의 독주는 누군가의 거룩한 목소리와 같이도 느껴집니다.

제2부 Un poco piu Animato 장조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조금은 반전됩니다. 하프의 아르페지오 반주에 실려 첼로가 밝고 강한 느낌의 선율을 뽑아냅니다. 관현악 반주 속에서 첼로의 독주가 낭만적인 정서와 격정적인 새로운 선율을 이끌어내며 변주를 펼치다가 점차 승화되는 적요감(寂蓼感)과 함께 쓸쓸하게 끝이 납니다.

전곡에 걸쳐 유대적 정서에 특유한 방황과 우수(憂愁), 체념과 고뇌가 엇갈리는 속죄의 느낌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곡입니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연주
콜 니드라이를 연주한 첼로의 거장도 많고 뛰어난 연주도 많지만 누구보다도 카잘스의 연주는 종교적인 경건과 신성 자체를 보여주는 독보적인 명연입니다. 오래되었고(1936년) 모노이지만 카잘스가 Sir Landon Ronald가 지휘를 맡은 London Symphony Orchetra와 함께 연주한 녹음은 음악적 순수함을 뛰어넘어 기도와 같은 최고의 경지를 들려줍니다.

하나님 말씀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시편 137편 1~4절이었습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콜 니드라이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모두 늦기 전에 속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아니면 시편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사로잡힌 뒤에 슬프게 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이 위험한 때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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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