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시인 이정하는 ‘그립다는 것은’이라는 시(詩)에서 그립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라고 읊었습니다.

독일 작곡가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들을 때 나는 지극한 그리움을 느낍니다. 특히 장중하면서도 서러웁도록 아름다운 서주와 아다지오 칸타빌레의 1악장을 듣다 보면 브루흐의 가슴속 깊숙이 웅숭그리고 있던 그리움이 바이올린의 가녀린 선율을 타고 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느덧 현(絃)을 긁어내는 활이 가슴을 후벼 파고 그리움을 도려내는 느낌을 받습니다.

악기의 여왕이라는 바이올린이 때로는 이렇게도 서럽고 가슴 아픈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현(絃)이 동물의 내장(gut)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달픈 소리로 흐느끼는 바이올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바이올린이라도 작곡자의 마음과 연주자의 손길이 같이 해주지 않으면 그냥 속이 빈 아름다운 나무 조형물에 불과합니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이 그렇게도 애절한 그리움을 바이올린으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이 곡에 브루흐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 곡 이외에 브루흐의 또 다른 걸작인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나 콜 니드라이에서도 아름다운 선율 속에 배어 나오는 그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브루흐가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았기에 그의 작품 곳곳에는 그리움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브루흐의 고향은 독일 쾰른 근교 숲이 많은 산지였습니다. 라인강이 흐르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의 고향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나이 든 뒤 고향을 떠나 독일 각지를 돌며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노년엔 베를린에 정착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음악 속에 그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있었던 것은 평생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곡을 쓸 무렵에는 독일을 떠나 영국에서의 체류가 예정되었던 때였기에 이 곡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이 그리움일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민속 선율을 사용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하프를 위한 자유로운 환상곡’
이 곡의 원제는 ‘스코틀랜드 민속 선율을 사용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하프를 위한 자유로운 환상곡(Fantasie fur die Violine mit Orchester und Harfe unter freier Benutzung schottischer Volksmelodien, Op. 46)’입니다. 사실상 바이올린 협주곡과 다름없는 이 곡이 협주곡 대신 환상곡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특정 지역의 민요 선율이 많이 인용되었고 4악장으로 되어있으며 형식이 너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브루흐는 1879년 겨울 베를린에서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당시 그는 곧 영국 리버풀의 필하모니 협회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할 예정이었습니다. 평소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있던 브루흐는 또한 스코틀랜드의 시인 월터 스콧의 작품을 읽고 큰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의 경이로운 연주를 듣고 감탄하여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스코틀랜드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끌어내어 이 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브루흐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 음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스코틀랜드 환상곡과 같이 문학과 민속 음악이 효과적으로 조화를 이룬 명작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월터 스콧의 작품에서 커다란 영감을 얻어 작곡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의 민속 선율들을 활용하였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스코틀랜드 민속 음악을 600곡이나 섭렵할 정도로 남다른 애정과 조예가 깊었던 그였기에 적소에 적절한 곡을 차용할 수 있었습니다.

선율을 중시했던 브루흐는 특히 민요 선율의 소박한 단순성에 심취했습니다. 하나의 좋은 민요 선율은 다른 어떤 음악 선율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으며 민요가 그 내면에 지닌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곡에는 브루흐의 이런 주관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악보 상으로는 네 개의 악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실제로는 3악장 구성처럼 들리고 첫 악장 앞에는 특이하게도 느린 서주가 놓여 있습니다.

브루흐는 이 곡을 쓰면서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을 쓸 때처럼 독일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아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곡을 스페인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파블로 사라사테를 위해 썼으며 완성되자 그에게 헌정했습니다. 1880년 9월 함부르크에서의 초연 때도 사라사테가 독주 바이올린을 맡았습니다. 이 곡의 바이올린 독주 부가 그의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보다 한층 더 적극적인 기교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사라사테가 있었던 것입니다.

곡의 구성
Grave의 서주는 하프가 함께 하는 장중하며 몽환적인 관현악으로 시작한다. 이어 나오는 독주 바이올린의 선율에서 가슴이 시릴 정도의 우수와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

1악장 Adagio Cantabile: 서주에 이어 쉼 없이 연주되는 풍부한 감성의 아름다운 악장이다. 하프의 반주로 펼쳐지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독주 바이올린의 주제는 스코틀랜드 민요 ‘늙은 롭 모리스(Auld Rob Morris)’를 인용한 것이다.

2악장 Allegro: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를 연상시키는 목관의 울림으로 시작하다 무곡 풍의 리듬이 나타난다.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이 유쾌한 선율을 노래하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먼지투성이 방앗간 주인(Hey, the dusty miller)’를 인용한 것이다.

3악장 Andante sostenuto: 독주 바이올린이 들려주는 사랑스러운 주제는 스코틀랜드 민요 ‘나는 조니가 없어서 쓸쓸해(I’m a doun for Lark O’Johnnie)’를 바탕으로 한 선율이다.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노래가 차분히 흐르다가 차츰 격정적으로 드높이 날아오르다 다시 차분히 가라앉으며 끝난다.

4악장 Finale, Allegro Guerriero: 극적이며 기백이 넘치는 마지막 악장으로 중세 스코틀랜드의 군가인 ‘우리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왈레스에서 피를 흘렸다(Scots Wha hae wi Wallace bled)’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독주 바이올린은 하프와 함께 눈부신 기교를 뽐내며 활기차고 현란하게 활약하다 마지막엔 느리게 첫 악장의 주제를 회상하다 끝을 맺는다.

Heifetz의 불멸의 명연주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곡이기에 내로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좋은 연주를 많이 남겼지만, 이 곡에 한한 한 그 누구도 Jascha Heifetz(1901~1987)의 연주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Heifetz의 연주로 이 곡을 듣다 보면 영국의 해학문학(諧謔文學)의 대가이자 음악 평론가인 버나드 쇼가 Heifetz의 연주는 너무도 완벽해서 신(神)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화요음악회에서도 Heifetz가 Malcolm Sargent가 지휘하는 New Symphony Orchestra of London과 협연한 불멸의 명연주로 들었습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12장 1~2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브루흐는 고향을 떠나 살았기에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고향을 떠날 때는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시 깨어있어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화요음악회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며 매주 화요일 Devonport의 가정집 정이정(淨耳亭)에서 열립니다.

이전 기사전리품을 나누다
다음 기사야단칠 때는 단 한 번만, 반복하지 마라
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