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방을 하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새해 심방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심방은 그들에게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심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해 첫날 복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심방을 원했던 것입니다.

새해 복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 사상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와 말씀의 복을 받기를 원하여 E 동네 중심으로 가까운 몇 동네를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처음이자 마지막 심방을 하게 하셨을까? 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분명 심방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을 믿고 각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심방은 사역할 동안 딱 한 번으로 족했습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심방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동네들을 심방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심방을 위해서 온 동네를 걸어서 다녀야 하기에 온 동내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온 동네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전과 보안이 전혀 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심방을 할 동안 보호해 주셨고 안전을 지켜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역이 끝나는 십 년 동안 보호해 주셨고 안전을 지켜 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찬송할 뿐입니다. 그리고 심방할 동안 날씨는 얼마나 추운지 옷과 신발이 꽁꽁 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 121편 8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역자를 지켜 주심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동네들을 심방하게 하셨을까 심방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심방을 하게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방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넘쳤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말씀으로 위로하심과 역사하심과 성령님의 은혜가 임하심을 보게 되었고 심방을 통해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볼 때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어찌 이런 환경에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 주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성도 가운데서는 가정 형편이 정말 어려운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 흙으로 집을 지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의 과거의 초가집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열악한 곳에 살고 생활은 어렵고 겨우 먹고 살아가면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즐겁고 기쁨으로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부끄럽고 자신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선교지의 성도들과 비교를 하면 우리들은 좋은 집에서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지만 만족함이 없이 염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을 채우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전6:7-8)

또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3:5)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지금 있는 것에 감사 찬송이 없으면, 만족함이 없으면 더 많이 가져도 감사 찬송이 없이 늘 없다고 하며 염려와 불평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누가복음 16:10)

우리들은 욥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21-22)

심방을 하기 전에 그들을 만났을 때 항상 즐거워하며 기쁨이 충만한 것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생활에 여유가 있겠지 했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그들의 환경을 볼 때 즐거워하고 기뻐할 조건은 하나도 없는데 어찌 이런 환경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참담한 환경에서 사는 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즐겁고 기쁨이 넘칩니까?”

그들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않습니까?” 하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환경은 정말 열악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마음에 모시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환경 가운데서 즐거움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심령에 모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이 안에 계시는데 어찌 즐겁고 기쁨이 없을까요? 우리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즐거움과 기쁨이 없을까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들과 무슨 차이일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왜 즐거움과 기쁨이 없을까?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셨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찬송이 기억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사랑 잊지 못해,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 섬기는 맘 변치 않아,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하나님께서는 촌장 집과 어느 동네의 서기장 집을 심방하게 하셨습니다. 촌장 부인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기 집에도 심방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촌장 집과 서기장 집에 심방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촌장과 서기장은 선교사가 온다는 것을 알고 피하여 다른 곳에 갔고 부인과 아들만 집에 있어 가정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서기장과 촌장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촌장과 서기장 집에 심방을 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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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활성
총신대학과 동 신학대원을 졸업하고, 1990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이민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O국에서 현지인과 더불어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담은 선교 이야기를 한 달에 한 번씩 한인 그리스도인과 나눌 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선교의 사명을 되새겨 각자의 부르신 현장에서 선교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