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잘 아는 시편 23편. 이 시는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한 시가 아니기에 특별한 머리말이 필요 없다. 어떤 상황에서나 있는 그대로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대와 문화와 민족을 뛰어넘어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온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아닐까?
시편 기자 중 한 사람인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였다. 우리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양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실상 이 양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정도로 무능하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양에게는 그것이 없다. 천적이 나타나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도망가는 것뿐이다.
양들은 의외로 고집도 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양을 훈련 시켜서 서커스를 하는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한 번쯤은 구경했을 로토루아 양 쇼는 훈련에 의한 쇼라기 보다 양의 본능을 이용한 쇼이다. 중동 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고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을 양 같은 사람이라고 빗대어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목자였던 다윗은 양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은 뉴질랜드 같은 자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광야이다 그런 곳에 양에게 목자는 곧 생명이다.
그래서 양은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아무나 목자 역할을 할 수도 없다. 험한 환경 가운데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유능한 목자가 필요하다. 다윗은 양의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다.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끄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출애굽 전 10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지는 등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지만 광야의 삶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그곳은 물도 없고 음식도 없다. 낮에는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고 밤에는 추워서 견딜 수가 없는 곳이 광야이다.
하루 이틀 잠시 광야에 나갔다가 돌아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를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가려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막아 주셨다. 40년의 매일 매일은 말 그대로 기적의 연속의 나날들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시간이 주어졌을까?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친히 건지신 구원의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삶을 알려 주시기 원하셨다. 즉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목자야!’ 이 뚜렷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의 시편 기자도 이러한 심정 아니었을까? 여호와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죽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작 문제는 하나님만 믿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분명 믿기는 하나 하나님만 믿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소리에 너무나도 쉽게 설득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따르고 있는 목자가 너무 많다.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 하나님보다 더 안정감을 두고 살아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러한 것들에 진정한 안정감을 두고 살아갈 수 없음을 몸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작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는 변이 바이러스 델타로 여전히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방역 모범국이었던 뉴질랜드도 이를 피해 갈 수 없었고 계속되는 코로나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대이며 위기의 시대이다.
이 비상한 위기 가운데 우리에게 염려와 두려움 불안과 우울이 덮쳐 오곤 한다. 과연 이 시대를 헤쳐 나갈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한 방법이 존재하기는 할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 모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전에도 없었던 어렵고 힘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동일한 메시지가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것이 아닐까? ‘내가 너희들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목자야’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목자인 그 분만을 바라보고 신뢰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닐까?
삶의 가장 큰 위기는 코로나가 아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때가 가짜 목자를 걸러낼 시간이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인간은 늘 부족하고 모자람을 느낀다. 많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 보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완벽한 만족에 이를 수 없다. 완벽한 행복도 없다. 때때로 만족감을 행복감을 느끼는 것뿐이지 이러한 감정은 늘 일시적이다.
오늘은 갈멜산의 승리에 감격할 수 있지만 다음 날 두려움 가운데 자신을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엘리야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그분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 됨과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장차 누릴 상속자라는 새로운 신분 때문에 나는 이미 행복 자임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족하다 행복하다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요 실제이다.
초대 교회 시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300년 동안 지하 무덤에서 살았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교리를 가지고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라는 이 교리 하나 가지고 그들이 300년 동안 지하 무덤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 예수님을 아니까 그분을 바라보니까 그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팬데믹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과 섭리를 풍성하게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