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을 넘어

서석민 목사

우리의 인생에 고난과 고통은 늘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우리 주변에 많은 고난과 상실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고난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찾아오면 우리는 마치 고난이 우리 가까이에 없었던 것처럼 당황스러워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됩니다.

Covid-19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도 우리 모두는 당황했으며,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알기 원했고, 즉각적인 교훈이나 해결책을 원하기도 했습니다. 고난을 마주할 때면 우리 대부분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유와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제자들이 보고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이 던진 이 질문 속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인간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죄가 아니고선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과응보’와 같은 원인과 결과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사고하는 것은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꽤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어떤 고난과 고통은 우리 개인의 직접적인 죄나 실수와 연관이 있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악하게 행동하면 관계가 깨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하고,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면 특정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도 하며, 임신 기간에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면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생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나태하고 게으르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가난에 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죄로 인해 일어나는 고통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들을 통해 약자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자살하는 문제, 택배 기사들이 과로사하는 문제, 사고가 예견된 위험한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문제, 이런 고통은 대부분 타인의 죄악으로 기인한 고통입니다.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자연재해의 경우 단순히 자연이 일으키는 것으로만 볼 수 없고,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환경을 망가뜨린 것의 축적된 결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은 분명히 인간의 죄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고통과 악의 문제는 인간의 죄악의 결과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이 선포하는 것처럼 죄로 인해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구속하시고 회복하실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떠한 고통은 어떤 개인이나 타인, 사람들의 직접적인 죄의 결과가 아닌 경우도 존재합니다. 아무리 질문을 해도, 도저히 인간의 논리와 언어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대신 무엇을 알려주셨나요? 원인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눈먼 사람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고, 그는 눈을 뜨게 되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의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나요? “왜?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고 질문하며 철학적으로만 접근했습니다. 철저하게 과거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원인 규명을 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으시고, 그 시선을 과거가 아닌 미래로 옮기시며 목적과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 목적과 소망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침과 진흙을 사용하셔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단순히 육적인 눈만 뜨게 한 것을 넘어서서 바리새인들도 알아보지 못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예언자로, 그리고 주님으로 알아보게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들보다 영적으로 더 밝은 눈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고자 했던 소망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다 고난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자동반사적으로 “왜?”라고 질문하게 되고, 원인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이라면,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넘어서서 여전히 나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과거가 있었든지, 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다 규명할 수 없고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할지라도 우리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과거에 묶이게 하는 모든 틀을 벗어버리고,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