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발인가?

출처 : 책‘왕이 된 양치기’본문 중 각색/도서출판 규장(2019)

나발은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 지역의 유지가 될 만큼 재산은 많았지만 이름처럼(Nabal : 바보) 고집스럽고 미련하며 거만하기까지 했다. 바보의 중요한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런데도 운 좋게 좋은 아내를 얻었다. 아내인 아비가일(Abigail)은 나발과는 반대로 아름답고 관대하며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광야의 도망 생활 중 다윗은 나발의 목동들이 이끄는 양 떼를 밤낮으로 지켜주었다. 목초지에서는 늘 예상 밖의 위험이 존재하는 법. 다윗의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는 나발의 양 떼를 보호하는 안전한 울타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발의 집에서 큰 잔치가 열리고 호화로운 음식으로 가득 찬 행사장에 행색이 초라한 다윗의 수하들이 나타난다. 늘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던 다윗은 그간 나발의 양 떼를 지켜준 공이 있다고 판단, 음식을 좀 나눠줄 것을 공손히 요청한다.

하지만 나발은 역시 나발이었던가? 그 요청을 단칼에 무시했다. 단순히 무시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주인집 나온 개가 짖느냐며 모욕하기까지 했다. 10년을 광야에서 훈련 받은 다윗도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자존심은 다 죽었지만, 자존감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윗은 분노의 칼을 찬 후 무장병력 400명을 이끌고 나발의 집으로 향한다. 오늘 나발의 집에서 하나의 생명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성경에서 보기 힘든, 아니 거의 유일한 다윗의 ‘살기’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먼저 접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는 자신의 집을 향하고 있는 다윗의 무장병력을 향해 질주한다. 그리고는 길 한 가운데서 마주한 다윗에게 무릎을 꿇고 대신 용서를 구한다. 단순히 잘못을 빌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며 달래고 설득했다. 당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니 이런 가치 없는 일에 피를 묻히지 말라며. 지혜로운 언행이었다.

이날 아비가일의 중재로 다윗은 살기를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고 나발의 집에서 벌어질 잔인한 살육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사무엘상 25:35).

어떤 사람과 관계가 크게 틀어진 적이 있다. 나발이란 이름처럼 미련하고 완고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그 사람과 틀어진 채로 지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내내 마음이 걸리고 불편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관계가 틀어진 것도 내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시도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리‘무례함’그 자체였다. 내가 이 정도까지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나왔으면 상대도 한 걸음 나오는 흉내 정도는 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일종의‘무시’였다. 순간 살기가 솟았다.

크게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는 장문의 메일을 써 내려 갔다. 내게 이런 무례한 반응을 하는 것이 부당한 행위라는 것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정연하게 적었다. 글로 일종의‘칼부림’을 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한 마디.

“여보.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 이번만 눈 딱 감고 풀면 당신이 원하는 모든 일이 이뤄질 텐데 그냥 한 번만 더 머리 숙이면 안 되겠어요?”

아비가일 같이 조언해주던 아내. 그 음성이 내면을 파고들어 살기를 감싸는 듯했다. 난 다윗이 아니었다. 분노가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크게 치솟아 올랐다. 결국 메일을 보냈고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소통이었다. 이후로는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고 관계가 틀어진 게 아니라 아예 끊어져 버렸으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사무엘상 25:25)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과의 화해는 무산되었고 관계가 풀리면 얻을 수 있던 모든 유익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슬펐다. 나는 영원히 이 부분을 마음에 걸려 하며 살아가게 될 터.

결국 이 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상대가‘나발’이라 생각해왔었는데 실상은 내가‘나발’이었다는 것을. 덧붙여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 이 땅의 모든 남자는 모두‘나발’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