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세계 최초의 카페는 어디일까? 알 수가 없다. 공식적으로는 1554년 터키의 이스탄불(당시 오스만 투르트 제국)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 아프리카와 중동 여기저기서 커피의 대중화 흔적이 간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확한 기원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 카페의 모태가 된 유럽은 어떨까? 단연 이탈리아이다. 공식적으로는 1645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1650년 영국의 옥스포드, 1686년 프랑스의 파리, 1689년 미국의 보스턴 순이다.

한 참 뒤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바람을 타고 중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에도 들어왔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는 어디일까? 단연코 집 앞 단골 카페이다.

올해로 10년째 운영 중인 이곳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 하우스다. 10년 전만 해도 서울을 제외한 지방 도시들은 카페 광풍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

내가 사는 곳도 인구 600만의 대 도시였건만 지금은 그 흔한 스타벅스조차 대형 백화점 지하에 겨우 하나 있었을 정도. 이런 곳에 지금의 단골 카페가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이탈리안 에스프레소와 핸드 드립 모두를 제공해주는 정통 커피 하우스가 집 앞에. 할렐루야!

한 편으로는 과연 장사가 될까 싶었다. 인적 드문 주택가 골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문을 여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아닌가? 우리 동네에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니…

초반에는 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였다. 호기심 가는 인물이 커피를 마신 후 매장을 나가면 뭐 하는 분인지 바리스타에게 물어보았다. 바리스타는 그 분의 신상을 슬쩍 공개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도 나에 대해 물어 봤었다고.

그렇게 바리스타를 중심으로 신상이 오가자 이후에는 자연스레 대화가 오갔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제작의 현실과 유럽 철학의 기원, 각종 부동산 정보와 정치 이야기 등은 모두 여기서 주워들은 것들이다. 주워들었음에도 결코 제법 묵직한.

그뿐만이 아니다. 우린 제법 잘 어울렸다. 시나리오를 쓰던 작가가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 올리던 날 시사회에 찾아가 축하해 주었고, 조용히 진행하려던 내 결혼식에도 말없이 참석해 주었다.

피자전문점 매니저를 통해 갑절의 토핑 피자를 얻어먹었고, 그의 동생인 운동 트레이너에게 건강 관리를 배웠다. 그 무렵 나는 카페에 모인 이들을 그림으로 그리곤 했었는데 사장님은 이 그림들을 모두 벽에 걸어 놓았다. 아마도 그것이 내 첫 개인전 아니었을지…

우리는 그렇게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10년,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이자 고객, 그리고 선생이 되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의 구심점은 물론 커피였고. 독특했던 점은 그리 어울리면서도 서로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페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각자의 여정에서 특정 시간을 함께 머무는 것뿐, 떠나는 이를 붙잡거나 회유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새로 오는 이에게 부리는 텃새도 없었고. 인간관계를 대충 한 것 아니냐고? 그건 아니다.

그 순간, 그 공간에서만큼은 진실되게! 하지만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이에게는 박수를! ‘한 사람이 오는 것은 한 일생이 오는 것’이라고 정현종 시인이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인생이 오가고 자유롭게 교류하던 그곳은 열여덟 평의 작은 공간이었음에도 거대한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카페는 모두의 아지트이자 커뮤니티였으며 플랫폼이 되어 주었다(Platform : 기차를 타고 내리는 승강장, 무대, 강단. 특정 장치나 시스템 등에서 이를 구성하는 기초가 되는 틀 이나 골격을 지칭하는 등,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

전국 카페가 9만 개를 돌파했다. 편의점보다 많다. 예전에는 ‘골목마다 편의점’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옛말이다. 이제는 골목마다 카페다. 하지만 집 앞 단골 카페와 같은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보인다. 분명 더 크고 화려해졌는데 오히려 작아 보이는 건 왜일까?…

뉴질랜드 한인교회를 경험해 보았다
뉴질랜드에서 생활하며 교인으로 등록하고 교회를 다녔었다. 교민교회는 해외라는 특성상 특정 지역이 아닌 전국 단위의 사람들이 모이곤 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서울, 수도권 사람들과 지방 사람들의 정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체감했다.

서울 사람과 수도권 사람이 다르고,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이 다른 등, 한국인이라고 다 같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정(情)’에도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한국 밖에서 알았다.

또한 교회는 정착하는 이보다 떠나는 이가 많은 곳도 있었는데 목사님들은 그런 부분에 거의 득도해 계셨다. 특별히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회는 유학생의 특성상 짧으면 1년에서 길어야 3, 4년 정도만 머물러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전심으로 학생들을 양육하는 목사님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 속에서 나는 하나님 교회의 큰 품을 엿 볼 수 있었다. 새로 오는 이에게는 두 팔 벌려 환대를! 떠나는 이에게는 두 손 모아 파송을!

게다가 교회는 교회 건물을 한인 행사에 필요한 장소로 제공했다. 건물을 공유함으로써 교민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었고 교민들에게는 필요한 정보 교류의 ‘장’이 되어 주었다.

새로 이민 온 가정에게는 정착의 디딤돌이, 새로 이주해가는 가정에게는 든든한 후방이 되어 주었고 단순한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공간을 뛰어넘어 교민 사회의 아지트이자 지역 커뮤니티, 그리고 플랫폼이 되어 주었다. 복음을 중심으로 한.

현재 대한민국에는 11만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선교단체 54,000여 개 포함). 편의점보다 두 배는 많고 9만 개를 돌파한 카페보다도 많다. 골목마다 카페라면 건물마다 십자가다. 이전보다 크고 화려해졌지만 넓게 품을 펼친 교회는 과연 몇 개나 될까?

지역의 안식처이자 피난처이며 플랫폼이 되어주는 그런 교회. 카페 얘기하다 보니 교회가 떠오르고 교회 얘기하다 보니 카페가 떠오른다. 카페가 교회인지 교회가 카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하나님 계신 곳이 교회지. 건물이 아닌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 말씀하신 예수님 가르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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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용욱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기독교 출판작가, 예술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커피’와‘예수님’으로 기독교적 사색을 담은 글을 연재하고 있다. 글쓰기를 배운 적도, 신학 학위를 받은 적도 없는데 12년 째 신앙서적 내고 있는 이상한 평신도.